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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paragraph:p0002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span>2009년 6월 14일 주일오후예배<br>
본문: 벧전 4:12-19<br>
제목: 토마스</p>
<!-- paragraph:p0003 -->
<p>[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p>
<!-- paragraph:p0004 -->
<p><br>
낮에 말씀드린 대로 2000년 교회사의 첫 순교자는 스데반 입니다. 그런데 125년 한국 개신교 역사의 첫 순교자는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 개신교의 원년으로 삼는 1884년보다 자그마치 18년 앞선 1866년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오다 대동강변에서 참수를 당합니다. 1840년 9월 7일에 영국 웨일스 지방 라야다에서 목사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습니다. 그는 옥스퍼드 의대 장학생 자리에 추천을 받았는데 그것을 마다하고 자기 아버지가 나온 런던대학 뉴 칼리지에서 1857년부터 신학을 공부합니다. 선교에 남다른 비전이 있었습니다. 1863년 5월에 졸업하고 그해 6월 4일 아버지가 목회하던 고향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데 당시 24세였습니다. 원래 26세가 되어야 안수를 받을 수 있지만, 선교사 지망생이었기에 졸업하자마자 안수를 받았습니다. 안수 받기 1년 전에 결혼하는데 갑부요 잉글랜드 영주의 딸인 캐롤라인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8월에 런던 선교회의 후원으로 아내와 함께 꿈에도 그리던 중국 상해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그다음 해에 아내 캐롤라인이 사산하는 바람에 죽습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선임 선교사와 관계가 좋지 않아 결국 본국에 선교사 사임서를 제출하고, 1865년 1월부터 8월까지 세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합니다.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간 겁니다. 세관에서 조선 상인 두 사람을 만나 조선의 정보를 얻습니다. 이 두 상인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조선에는 5만의 신자와 11명의 신부가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문은 조선말로 되어 있는데, 성경은 조선말로 된 게 한 권도 없다고 했습니다. 개신교 종교도 없다는 말을 그는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토마스는 흥분했고, 조선으로 가야겠다고 확신하며 조선 선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세관에 사직서를 내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으로 선교지 답사차 1차 조선 여행길에 오릅니다. 이게 1865년 9월 13일입니다. 서해 백령도 근처 어느 섬에 도착했고 거기서 2달 반을 지내며 조선말을 익히고 가지고 온 한문 성경 200권을 배포합니다. 일단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런던 선교회에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받고 많은 물량의 한문 성경을 확보해서 조선으로 가는 배편을 구합니다. 마침 미국 배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를 만납니다. 1866년 8월 9일 제2차 조선 선교여행에 오릅니다. 제너럴 셔먼호가 중국을 출항한 지 1주일 만에 대동강 입구 용강 주영포에 도착합니다. 그러니까 평양 쪽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온 겁니다. 거슬러 오면서 배가 정박하는 대로 성경을 배포했습니다. 그리고 8월 27일 평양 한사정에 배가 정박하는데 거기서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합니다. 이때가 어느 때냐면 대원군이 권력을 쥔 지 3년이 지나던 때입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하던 때입니다. 쇄국정책을 펼치던 때입니다. 1866년은 가장 컸던 가톨릭 박해, 곧 병인대박해가 일어난 때이기도 합니다. 대원군이 권좌에 있던 8년간 2만의 신자를 살해했습니다. 그러니 1866년의 분위기는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제너럴 셔먼호가 상선임에도 무장을 했고, 조선 관군을 향해 협박도 하자 결국 무력 충돌이 발생하고, 배는 9월 2일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합니다. 흥분한 조선 관군이 상인들을 다 죽입니다. 그 와중에 토마스 선교사는 배에 가져온 성경을 강둑으로 던지고, 마지막 한 권은 자기 품에 품고 강에 뛰어들었는데, 생포됩니다. 토마스도 즉각 대동강변에서 참수당합니다. 박춘권이란 사람이 형을 집행합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자 토마스 선교사는 성경을 웃으며 건네고, 마지막 기도를 올립니다. 그러니까 토마스는 제대로 조선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27세의 나이로 순교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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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러나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가 조선 땅에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의 사후 10년 뒤부터 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겁니다. 놀라운 것은 그에게서 성경을 받고 목을 친 박춘권은 1899년 평양교회의 장로가 됩니다. 토마스에게서 성경을 받은 장사포의 홍신길이란 사람은 서각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석호정 만경대에서 토마스 선교사에게서 성경을 받은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설립합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성경을 찢어 벽지로 사용한 영문 주사 박영식은 자기 집을 널다리 교회의 예배 처로 제공합니다. 그리고 평양은 후에 한국의 예루살렘이 됩니다. 평양에 신도와 교회가 가장 많았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서린 대동강물을 마신 사람들이 다 신자가 된 겁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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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토마스가 런던 선교회에 보낸 선교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바다 건너 조선이라는 나라의 땅에 선교사 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가슴 아픕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제가 가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선교회는 토마스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한 겁니다. 그의 목을 친 박춘권의 진술입니다. 예수 믿기 전입니다. “내가 서양 사람들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내가 그의 목을 베려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내게 붉은 베로 입힌 책을 주었다. 내가 그를 죽이기는 했으나 받아 왔노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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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현재 영국 웨일스의 하노버 교회는 교인이 5명뿐이라고 합니다. 토마스의 부친이 목회했고, 토마스가 안수 받은 교회인데, 3년 동안 방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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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우리 한국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토마스 선교사의 희생과 순교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의 부끄럽지 않은 후예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 개신교사 125주년 벽두에 이런 훌륭하고 위대한 선교사의 피가 있었습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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