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
읽기 설정
미리보기 인용
복사되는 내용은 인용 정보와 미리보기 주소다.
현재 미리보기 주소:
올해로 한국 개신교가 125돌을 맞았습니다. 1884년 의료 선교사 알렌의 입국을 한국 개신교사의 원년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그야말로 <현대 선교역사의 기적>이라 할 만큼의 경이로운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같은 아시아권인 중국 선교의 경우 1607년 로버트 모리슨의 선교로 시작하여 27년간 불과 3명의 결신자를 얻는 데 그쳤고, 태국에서는 30년간의 선교로 단 2명이 세례를 받았을 뿐입니다. 몽골의 경우는 더 기가 막힙니다. 1817년 영국의 런던 선교회가 슈미트 선교사를 파송한 이래 스톨리브라스, 스완, 길무어 선교사 등이 무려 47년간이나 사역했음에도 단 한 명의 결신자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는 선교에 착수한지 채 30년도 안 돼 이미 노회를 조직(1909년)하고 총회를 설립(1912)했으며 일본과 시베리아, 중국 등지에 조선인 선교사까지 파송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5년 현재 우리나라의 개신교 신자는 전체 국민의 18.3%(가톨릭 10.9%)로 국민 10명중 2명이 개신교 신자인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선교 120년 만에 이룩한 성과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신구교가 다 무수한 순교자를 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곧 교회의 씨앗>이라고 한 교부 터툴리안의 말이 가장 실감나는 교회가 바로 우리 한국 기독교라 할 만큼 이 나라 신구교의 내면에는 지금도 숭고한 순교의 피가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개신교보다 100년 앞서 이 땅에 전래된 가톨릭은 네 차례나 극심한 박해를 당하며 약 3만 명의 순교자를 냈고, 후발인 개신교 역시 일제와 6.25를 거치면서 약 3천 명 가량의 순교자를 배출했습니다.
◎ 가톨릭의 순교사
을사추조적발사건(1786년)으로 김범우, 이백 같은 최초 순교자를 낸 천주교는 그 후 제사문제로 촉발된 신해박해(1791년)을 거쳐 신유대박해(1801년) 때는 정약종을 비롯한 한국 천주교 초대 지도자들이 거의 다 순교하는 참극을 당합니다. 그 후에도 다수의 서양 신부들과 신도 200여 명이 순교한 기해대박해(1839년)와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이 순교한 병오박해(1846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8년간이나 계속된 병인대박해(1866)를 겪었는데 특히 병인대박해 때는 한국 천주교사상 가장 많은 약 2만여 명의 순교자를 냅니다.
◎ 개신교 순교사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조선 총독 데라우찌를 기독교인들이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시작된 <105인 사건>은 실은 기독교 애국지사들을 잡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음모였습니다. 어쨌든 그 사건에 연루되어 기소된 개신교 지도자는 선교사를 포함해 모두 123명이었으며 그중 92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또한 1936년부터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로 주기철, 이기풍, 최봉석 목사 등 수많은 지도자와 성도들이 목숨을 바쳤으며, 해방 후에도 분단과 함께 북쪽 교회는 공산당에 의해 박멸 당하며 많은 순교자를 냈고, 남쪽 교회는 6.25를 겪으며 역시 많은 순교자를 양산했습니다. 손양원, 김익두, 남궁혁, 송창근 목사 같은 지도자들이 다 이 때 순교했습니다. 특히 6.25를 전후해서는 집단 순교가 많이 발생했는데, 영암교회 24명, 상월교회 25명, 병천교회 66명, 진리교회 48명, 염산교회 77명, 야월교회 65명 등 전교인 혹은 일가족이 몽땅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학살당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듯 우리 한국 교회의 순교의 역사는 세계에서도 그 유례가 흔치 않을 만큼 통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교신앙이 오늘의 한국 교회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