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30414m 힐링을 위하여(막 16:7-8)

20130414m

막 16:7-8

힐링을 위하여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요즘은 웰빙이 아니라 힐링입니다. 수년 간 웰빙을 얘기해 왔는데 지금은 힐링이 대세입니다. 힐링이 문화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왜 웰빙이 아니라 힐링입니까? 웰빙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힐링이 먼저입니다. 몸과 마음의 병을 갖고 어떻게 잘 살 수 있습니까? 회복과 치유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은 맹목적으로 웰빙하다가 한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반성적으로 힐링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수순으로 볼 때 힐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성경은 원본이 없습니다. 다 사본입니다. 틀림없이 원본은 있었겠으나 지금 우리 손에는 없습니다. 가장 권위 있는 사본은 주후 4세기에 나온 것들입니다. 그 전에는 양피지 사본이 없었습니다. 기독교가 박해를 극심하게 당하다가 주후 313년에 와서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며 기독교가 공인됩니다. 그 이후에 나온 성경들이 우리가 가진 가장 권위 있는 사본입니다. 양피지에 적혀 있어서 비교적 상태가 아주 좋게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발견된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이 다 4세기에 양피지에 제작된 것들입니다. 이렇게 4세기에 나온 양피지 사본에는 마가복음서가 16장 8절까지만 있습니다. 9절부터 마지막 20절까지는 없습니다. 9절부터 20절까지는 적어도 7, 8세기 사본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 9절부터 20절까지는 큰 괄호로 묶어 놓고 있습니다. 각주를 달아 오래된 사본에는 그 부분이 없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요, 다른 복음서 편집의 제1차 자료로 삼았던 마가복음서는 사실상 16장 8절로 끝납니다. 주님이 갈릴리에서 보자고 한다고 천사가 전한 말씀이 마가복음의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왜 주님이 부활하신 곳이고 좌절한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여인들이 여전히 슬픔에 잠겨 머물고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먼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셨을까요? 마태복음 28장 7절도 마찬가지로 말씀합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자들의 힐링 때문입니다. 왜 예루살렘에서 제자를 치유하시면 아닙니까? 거기는 제자들의 힐링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루살렘에서 만나자고 했다면, 제자들이 이제야 봉기하나 보다, 거사를 일으키나 보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 밖 베다니도 아니고 갈릴리입니까? 갈릴리가 주님을 처음 뵌 첫 사랑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처음으로 소명을 받은 장소가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추억의 장소요, 대립과 싸움, 증오, 갈등, 죽음의 이전 장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저 먼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 거기서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첫 사랑, 첫 소명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당시 제자들은 너무나 많은 아픔과 좌절을 겪으며 그야 말로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칠대로 지쳐 있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첫 사랑의 장소인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진정한 힐링을 위해서 말입니다. 


힐링의 현장으로 갑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인 21장 4절 이하입니다.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이것은 어떤 상황입니까? 베드로를 위시한 갈릴리 제자들이 낙심천만해서 다 갈릴리로 낙향을 했습니다. 이들은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한 주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낙향한 게 아니라, 낙심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베드로야 말로 상처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과 최후만찬석상에서 얼마나 호언장담했습니다. 주님이 옥에 가시면 옥에 갈 것이고, 주님이 죽는 데 가시면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닭 울기 전 세 번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기나 잡겠다며 옛 직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제는 고기잡이도 되지 않습니다. 새벽녘에 철수하려고 하는데 주님이 그 바다에 나타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하셨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습니다. 정확히 3년 전에도 바로 그 바다에서 베드로는 주님 말씀에 의지해 그물을 내려 두 배에 가득 차도록 고기를 잡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나를 따르라 하시며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 하시며 사도로 삼으십니다. 그런데 지금 그때와 똑같은 상황을 연출하시며 베드로의 소명을 회복시킵니다. 


제자들이 뭍으로 올라오자 주님은 숯불에 생선과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생선과 떡으로 식사를 마치자 비로소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도 똑같은 질문을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까?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뜰 숯불 가에서 주님을 딱 세 번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더도 덜도 아닌 세 번에 걸쳐 사랑을 확인한 것입니다. 아마 이 때가 새벽녘이니 틀림없이 근처 마을에서 닭소리가 들렸을 겁니다. 고도의 영적이고 심리적인 처방입니다. 주님은 당시에 사랑 말고 얼마든지 다른 것을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어째서 나를 버리고 달아났느냐? 어째서 나를 저주했느냐? 어째서 낙향했느냐?’ 그런데 주님은 끝까지 사랑만 확인하십니다. 왜냐면 사랑이 회복되어야, 주님과의 원초적인 관계가 복원되어야 아픔도 치유되고 소명도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늘 우리에게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은 절대 우리의 능력이나 재주를 확인하고 싶어하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님에 대한 우리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짚어야 할 것은 주님이 베드로에게 사랑이란 말을 한 것과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이란 말이 틀리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실 때 사용한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은 필레오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 사랑, 영원한 사랑, 불변의 사랑,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주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필레오로 답합니다. 필레오는 우정입니다. 선택적인 사랑입니다. 필로소피는 철학을 가리키는데, 필로는 사랑이고, 소피는 지혜입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 철학입니다. 필하모니는 하모니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아가페로 묻고, 베드로는 필레오로 답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주님도 필레오로 물으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베드로의 눈 높이에 맞추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수준에 맞추어 주님이 양보하신 것입니다. 끝까지 아가페를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아가페가 안 되면 필레오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베드로가 이 때 당연히 아가페로 대답했을 겁니다. 그런데 뼈아픈 실패를 통해 자기 주제를 파악한 것입니다. 겸손해진 겁니다. 그래서 필레오로 대답했는데, 주님이 그것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양보하셨습니다. 아가페를 철회하고 세 번째는 필레오로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힘을 내어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우리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엄숙한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주님을 배신했든 오늘 다시 한 번 나를 찾아오신 주님 앞에서 확실하게 우리의 애정을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아가페는 자신 없으나 필레오라면 저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면목 없고 부끄러우나 필레오로 물으면 주님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수준의 고백은 가능하십니까? 꼭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야 그간의 우리의 아픈 상처가 치유되고, 주님에 대한 초심이 회복되며, 그래야 내 사명과 소명이 복원되고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사랑만큼은 확인해 드려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참패한 제자들 앞에 나타나 다른 게 아니라 사랑을 확인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힐링의 진정한 첫걸음입니다. 제자들 보십시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불같은 생을 살다가 영예롭게 순교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되찾고 초심을 회복하고 몸과 마음이 힐링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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