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324n 나귀 주인(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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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4n
막 11:1-10
나귀 주인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 종려주일에 주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물론 다른 때는 늘 걸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나귀 새끼를 타고 행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특별히 주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길에 나귀를 제공했던 그 주인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만 짚어보겠습니다. 그는 우선 이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도 이름은 있었겠지만,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무명의 헌신자입니다. 나귀 새끼를 내놓는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일이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 말씀입니다. “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주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구체적으로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구속사적 사건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찮은 게 아니라 대단한 사건입니다. 그런데도 이 나귀 주인은 전혀 생색을 내지 않습니다. 자기 이름이나 명예를 선전하지 않고 끝까지 익명의 헌신자로 자기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이게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하는 일은 주님만 드러나야 합니다. 그게 아무리 명분이 있고 대단한 일이라 해도, 수 백 년 전에 예언된 구속사적 사건이라 해도 나는 끝까지 주님 뒤에 숨어야 합니다. 주님만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주님 앞까지 영광이 상달될 겨를이 없습니다. 중간에서 다 가로채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도 우리가 영광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주님 이름보다는 우리 이름을 선전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나귀 주인을 보십시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께 봉사했습니다. 주님은 오늘날도 이런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주님이 기대하시는 진정한 헌신자는 이런 사람입니다. 자기는 온전히 주님 뒤에 가서 숨고 주님만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라는 헌신자, 주님은 이런 사람을 환영하십니다.
이 나귀 주인은 한 번도 사람이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바쳤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익명의 봉사자가 주님께 바친 나귀는 이미 사람이 타고 다녔던 때 묻은 나귀가 아니라 사람이 타 보지 않은 순수하고 흠 없는 나귀였습니다. 이게 옳습니다. 주님께 바치는 제물의 요건은 흠 없고 티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바칠 때 하루 첫 시간, 때 묻지 않은 새벽, 우리가 한 주간을 바칠 때도 한 주간의 첫날인 주일을 헌상해야 합니다. 소득을 바칠 때도 소득의 첫 열매인 십일조를 바쳐야 합니다. 이게 무슨 개념입니까? 때 묻지 않은 걸 바치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제사장의 검증을 받았겠습니까? 여러분, 쓰다 남은 시간은 안 됩니다. 쓰다 남은 돈,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은 이유는 피의 제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첫 새끼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곡식 제사여서가 아니라 먹던 것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여유가 있어야 주님을 위해 일하고, 시간이 있어야 예배에 나오고, 쓰다 남아야 헌금하는 것은 안 됩니다. 주님을 불우이웃돕기처럼 하면 안 됩니다. 나귀 새끼의 주인에게서 이 점을 배워야 합니다. 누가 쓰던 중고품을 선물하면 유쾌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당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게 어떤 것들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타지 않은 나귀 새끼는 없습니다. 주님이 기꺼이 열납하시는 제물을 바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입읍시다.
마지막으로 이 나귀 주인은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자 즉시 드립니다. 3절입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6절도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이것도 중요합니다. 머뭇거리거나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몇 날 며칠 고민하다가 겨우 결심한 게 아닙니다. 우리와는 너무도 다릅니다. 우리는 주님이 쓰시겠다는 데도 아직도 인색합니다. 얼마나 고민을 많이 하고 갈등하며 시험에 듭니까? 우리는 주님이 걸어서 들어가시겠다고 할 때는 고민이 없는데, 나귀를 타고 들어가겠다고 하면 시험에 듭니다. 나귀 주인처럼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즉시 드립시다. 고민하거나 시험에 들지 마시고 즉각 내드립시다. 그래야 주님이 만 배로 갚으십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상처 받지 마십시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드려야 은혜가 됩니다. 갈등하고 시험에 빠지면 내게 도움이 안 됩니다. 적어도 주님이 쓰시겠다면 즉각 내드리는 겁니다. 그래야 주님의 구속사역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헌신과 봉사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그런 자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그게 나귀든 소든 아까운 줄 모르고 선뜻 내드리는 믿음의 봉사자, 헌신자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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