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본디오 빌라도

굳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해 책임을 묻는다면 누구를 꼽아야 할까요? 가룟 유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아우성친 유대인들? 아니면 그들의 압력에 굴복해 결국은 주님께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 


사도신경은 주님이 <이 사람의 피에 대해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며 유대인들 앞에서 손을 씻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빌라도야 말로 지난 2천년 동안 주님 십자가 사건의 주범으로 각인되어 저주의 대명사로 불리어 왔습니다. 그는 주후 26년 제5대 총독으로 유다에 부임해 10년간 재임한 로마제국의 관리였습니다. 헤롯 아그립바가 로마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는 절대 굽힐 줄 모르는 사람으로 앞뒤를 가리지 않으며 폭정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재판도 없이 죄수들을 처형하는 등 끝없이 잔인하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고발장이기 때문에 순수 객관적인 평가는 아니겠지만 그러나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엽기적인 사건, 즉 빌라도가 무력봉기를 일삼는 갈릴리 사람 몇을 본보기로 처단하여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성전의 제물에 섞었다는 증언으로 보아 전혀 근거 없는 모함만은 아닌 듯합니다. 그 외에도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고려해 예루살렘 성내에는 군대 주둔을 피해 온 전임 총독들과는 달리 빌라도는 처음 부임하면서부터 성내에 군대를 진주시켰다가 유대인들이 연 5일 동안 총독관저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 발포명령까지 내리지만 결국은 군대를 성 밖으로 철수시켰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예루살렘의 상수도 건설을 위해 성전예산 유용을 강요하다 유대인들이 항거하자 군대까지 동원해 진압하고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인명을 살해한 사건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주님을 재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끌고 와서 고소하자 빌라도는 일단 주님의 행위를 법에 비춰봅니다. 그러나 이렇다 할 혐의점이 없자 즉각 그 고소를 기각합니다. 유대인들이 강하게 반발하며 더욱 공세를 취합니다. 자칫 폭동이라도 일어날 기세자 빌라도가 한 발 물러나 다시 주님을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뭔가 구속할 꼬투리를 찾자는 겁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실패합니다. 그래서 또 한 번 무죄를 선언합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유대인들의 광분이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비장의 카드를 제시합니다. 소위 정치적 협상을 꾀한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의 참소대로 일단 주님을 죄인으로 간주하고 대신 유월절 특사 케이스로 방면하면 어떠냐는 타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마저도 거부하며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빌라도가 다시 한 번 융화책을 시도합니다. 주님께 왕복을 입히고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운 후 군중들 앞에 끌고 나와 희롱과 모욕의 대상을 만듦으로써 적당히 무마해 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유대인들이 친 최후의 그물에 걸립니다. <이 사람을 석방하면 황제의 충신이 아니다.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를 놓으면 황제에게 반역하는 것이다!> 이로써 빌라도는 꼼짝없이 자신이 황제의 충신임을 증명해야 하는 마지막 골목에 내몰린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주님을 십자가형에 내주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 유대 군중들의 충신이 되고 만 것입니다. 황제의 충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로마제국의 법, 황제의 법을 유린했고, 자신의 정치생명을 위해 유대 군중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빌라도의 아내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성경에도 그녀가 남편에게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해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마 27:19)하며 주님을 정죄하지 말 것을 간청하고 있는데, 실제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빌라도의 아내 <프로클라>를 성인의 반열에까지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 빌라도는 주님을 심판하며 실은 자신의 비겁한 양심을 심판했습니다. 주님은 빌라도의 심판을 받으시며 도리어 정치권력의 허구를 심판하셨고, 기득권 수호에 미친 종교인들의 송사를 당하시며 도리어 그들의 거짓과 악의를 고발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본래 심판 받는 자를 통해 심판하는 자를 심판하시는 심판주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