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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사 7:10-17)

임마누엘

사 7:10-17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십시오. 아하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그게 어떤 것이든 좋으니 <네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에게 확신을 주시고 믿음에 굳게 서게 하시기 위해서였는데 아하스는 무례하게도 하나님의 그 은혜로우신 제안을 거부하며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가 그렇게 말한 진짜 이유는 하나님보다도 앗수르 군대와 그들이 섬기는 신의 도움을 더 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괴롭히지 말라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13절).

<다윗의 집>이란 유다의 왕가, 즉 아하스의 집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이것은 압제와 폭정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 다시 하나님마저 모욕하려 드느냐는 말씀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했던 불의한 재판관처럼(눅 18:2) 끊임없이 하나님을 괴롭혔습니다(말 2:17). 불신하고 모욕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더 쓰리고 아프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탈무드에는 <아내를 까닭없이 괴롭히지 말라 그녀의 눈물방울을 하나님이 세고 계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다, 그것도 다윗의 집이라는 아하스 왕가는 백성들을 멸시하고 학대하므로 괴롭혔을 뿐 아니라 철저한 불신과 모멸로 하나님마저도 괴롭히며 고문했습니다. 하나님은 경외와 예배의 대상이시지 어떤 경우에도 무시와 모욕의 대상일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십시오. 믿음과 순종과 찬양으로 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성도가 되십시오. 


징조를 주시리라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절).

사람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약속을 무효화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아하스가 징조를 원치 않았지만 하나님은 기어이 당신의 약속과 계획을 관철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곧 <임마누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와 사상과 윤리와 도덕은 다 상향식 구도를 가집니다. 열심히 고행하고 수도하며 믿거나 열심히 진리를 추구하고 도를 닦아 깨닫거나 착하고 선하게 살므로 구원을 받고 해탈을 하고 또 죽어 좋은 곳에 가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의 구원의 주체가 되어 신을 찾고 구원의 경지에 이르자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윤리주의. 고행주의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만큼은 상향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오신 하향식 종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종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온 하늘을 다 헤매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친히 처녀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인간의 힘이나 재주로는 하나님을 찾거나 만날 수 없습니다. 땅도 아닌 저 하늘 어디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나를 찾아 오셔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사됩니다. 기독교는 바로 그런 임마누엘의 신앙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