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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6m: 공정한 잣대(롬 2:12-16) 창립기념주일

2009년 4월 26일 주일낮예배/창립기념주일
본문; 롬 2:12-16
제목: 공정한 잣대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여러분, 예수를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구원을 못 받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은 죽어서도 천국을 못 갑니다. 험한 곳에 갑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믿고 성경의 가르침도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다른 의견 있으십니까?

그러면 옛날 사람들, 삼국시대나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옛날 이땅에서 살았던 선조들은 어떻게 됩니까?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100년쯤 앞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는 반만년 역사인데, 대다수 우리 선조들은 성경이 무엇인지, 기독교가 무엇인지,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고 죽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것은 남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 집안 얘기입니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은 어디에 계실까요? 복음을 듣지도 못했는데 그분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지옥에 보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원천적으로 그분들에겐 복음을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믿지 않은 책임을 물어 지옥에 보내면 어떡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만을 잣대로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로마서를 쓴 바울도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얘깁니다.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 복음을 듣지 못해서 못 믿은 사람을 같은 잣대로 심판하는 것은 공의롭지 못하다는 겁니다. 12절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율법 시대의 범죄는 율법으로 심판하시지만, 율법이 없던 시대는 율법 없이 심판하십니다. 그래야 맞지 않습니까? 12절 말씀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없던 시대 때의 심판 잣대는 무엇입니까? 그때는 율법 없는 이방인의 본성(14절), 이런 이들은 양심이 그 증거(15절)가 된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과 양심이 그 기준입니다. 율법 시대에도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적어도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습니다. 그러면 율법 시대 이후 복음 시대는 무엇이 심판의 잣대입니까? 당연히 복음입니다. 믿음입니다. 지금과 같은 복음 시대는 복음, 믿음이 절대적인 심판의 기준이 되고, 율법 시대에는 율법, 행함이 잣대가 됩니다. 그리고 율법 이전 시대는 인간의 본성, 양심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누가복음 12장 45절 이하입니다.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여기에 보면 심판 곧 최후 결산의 중요한 원칙이 다 나옵니다. 그 기준이 다 다릅니다. 몰라서 행치 못한 종은 적게 맞고, 알고도 행치 않은 종은 많이 맞습니다. 공명정대하십니다. 복음 시대의 사람에게 율법의 잣대를 적용하지 않고, 율법 시대 사람에게 복음 시대의 잣대를 적용하시지 않습니다. 하여간 마지막 때는 모든 민족, 문화에 가장 공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지기에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공명정대하게, 마치 칼처럼 정의로운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절대 염려나 걱정하실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도 억울하거나 손해 보지 않게 심판하실 겁니다. 아무리 큰 벌을 받아도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게 심판하십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침을 튀기며 진화론을 가르치던 생물 선생님이 제게 늘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으라’고 저만 보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끝까지 그냥 놔두시는 겁니다. 저는 얼마나 약이 올랐는지 모릅니다. 그분이 34살 노총각이었는데, 24살 예쁜 부인까지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어떻게 저런 악당에게 잘해 주시나 싶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얘야 너무 속상해 하지 말아라. 어차피 저 사람은 나중에 힘든 곳에 갈 텐데 살아 있을 동안만이라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놀랍게도 그날 이후로 그 말씀이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힘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 믿는 사람에게도 공평하십니다.

그러면 공자님이나 부처님도,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사람도 안정적으로 천국에 갔겠지요? 대단한 분들이지 않습니까? 믿음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절대적인 분수령이 아니라면 그분들도 다 천국 가셨겠지요. 죄송하지만 그건 누구도 모릅니다. 마치 우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목사님이나 신부, 성자들이 반드시 천국 갔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과 똑 같습니다. 공자님이나 부처님이 정말 양심대로 살고, 인간 본연의 심성대로 살았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오늘 본문 앞인 11절을 보면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다’고 했고, 16절 하반절을 보면,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양심적인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가 양의 탈을 쓴 이리인지, 빛의 천사를 가장한 악마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왜냐면 하나님만이 우리 중심을 꿰뚫어 보실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지키는 데 목숨까지 걸었던 외식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장 33절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자타가 공인한 의인들이었던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인군자라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얼마든지 독사의 자식일 수 있습니다. 회칠한 무덤일 수 있습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가지 못합니다.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해서 천국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날에 불법을 행하는 자여,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반면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 이하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의 본산이요, 대제사장은 유대교의 수장이고, 장로는 유대교의 원로들입니다. 이런 의인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구원이 보장된 게 아니라고 합니다. 목사라고 장로라고 유명한 부흥사라고 기도원 원장이라해서 자동으로 천국가지 못 합니다.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자고 도덕군자요 종교 창시자라 하더라도, 양심의 거성을 자처하는 사람이라해도 하나님의 척도에 합당해야 합니다. 그게 율법이든 복음이든 양심이든 인간의 본성이든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해야 합니다. 유대교의 기준에서는 세리와 창기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죄인 중에서도 악성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어쨌든 이 시대는 복음의 시대입니다. 따라서 이 시대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잣대는 오직 믿음입니다. 선포된 복음, 주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신 구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천국과 지옥의 분수령입니다. 그런데 복음 시대의 불신자도 두 부류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해서 못 믿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못 믿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 자신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응분의 징계를 하나님께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전도하는 사람이 없어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 십자가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이런 사람에 대한 심판과 저주의 책임은 누가 집니까? 구약 에스겔 3장 17절 이하입니다. “[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이것은 내가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안 믿고 죽으면 내게는 아무 책임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내 이웃이나 부모나 형제나 동족이 죽어 지옥갔다면, 그 죄값을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겠다는 겁니다. 내 손에서 찾겠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다 복음의 파수꾼으로, 복음의 나팔수로 부르시고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저 나 하나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부르셨다는 뜻은 나로 하여금 그들에게 나가서 복음의 나팔을 불라고 소명자로 부르신 겁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은 무조건 복음의 나팔수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망각하고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 내 주변 사람이 죽었다면 그 생명의 값을 하나님이 내게서 찾겠다는 겁니다. 내가 한 달이라도 먼저 믿었다는 것은 복음을 믿지 않는 자에게 전하라는 엄숙한 소명입니다. 이 소명을 방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모든 불신자들은 이 시대 모든 신자들의 연대책임입니다. 이 시대의 불신자들을 어느 시대 사람이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동시대 사람만이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신자 개인과 이 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의 가장 원색적이고 원초적인 과제이고 사명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의 존재 이유입니다.

오늘로서 우리 푸른 교회는 창립 14주년을 맞았습니다. 창립기념주일을 맞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우리 모습을 성찰하십시다. 훗날 우리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서 다른 사람의 핏값에 대해 자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전도해야 합니다. 복음의 나팔을 힘껏 불어야 합니다. 아직도 이 땅에는 열 명 가운데 두 명 정도만 예수 믿고 있습니다. 절대 다수는 아직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책임과 사명을 진지하게 되짚어 보면서, 오늘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고 결의하는 성도들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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