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안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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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밤이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어둠 속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모두가 열광하며 전쟁의 북소리를 울릴 때 홀로 평화를 외친다는 것, 오직 물질의 힘만을 믿고 사는 세상을 향해 정신과 영혼의 성숙을 강변한다는 것, 분노와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용서와 화해를 부르짖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보여준 사건이자 언제나 남을 인도하시던 분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여준 안타까운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제자들 역시도 <아, 현실을 바꾼다는 것은 주님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구나>하며 몸을 떨었을 것입니다. 믿음의 급작스런 붕괴와 악한 세력들의 주도권에 대한 불가피한 승인, 그것은 마치 거리에 나붙은 포고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쓸 데 없이 예수 주변에서 얼쩡거리다 걸려들지 말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라!>
아닌 게 아니라 그 포고문 앞에서 베드로가 지금 주님을 <멀찍이> 따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님과 자신 사이에 <안전거리>를 확보한 것입니다. 너무 멀면 양심이 켕기고 너무 가까우면 자신의 신변이 위태롭습니다. 물론 이것은 베드로만의 사정은 아닙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밀착거리>에서 따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최소한 따르는 흉내는 내야겠는데 지근거리에서 좇자니 자신이 없고 그렇다고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다보니 결국은 멀찍이서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게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의 고민이고 우리 모두의 엉거주춤한 자세입니다.
베드로가 용케 대제사장의 집 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잡혀 오신 주님이 심문을 받으시며 짓이겨지고 밟히고 침 뱉음과 주먹질과 온갖 모욕을 다 당하시는 동안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하인들과 함께 숯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따라오지 않았는가? 이 정도면 됐지 내게 뭘 더 바란단 말인가? 나도 언 몸을 녹여야겠는데 은혜의 숯불을 쬐는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해 유엔의 강도 높은 제재가 내려졌습니다. 북한도 연일 험악한 위협을 쏟아내며 강력 반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전쟁의 북소리가 울리고 북한이 핵 깃발을 치켜들며 도발을 벼르고 있는 마당에 우리가 과연 끝까지 평화와 사랑을 외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하, 이제 보니 너도 저 놈과 한 통속이로구나! 벌써 쓰는 용어부터가 다르잖아!>(마 26:7)하는 누명과 낙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지켜내자는 평화운동을 계속 벌여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을 때도 한 하인이 그를 알아보고 기관원처럼 날카롭게 추궁했습니다. <맞아! 너도 평소에 평화를 외치던 자가 아니냐? 원수를 사랑하라며 사람들을 선동하던 저 자와 같은 패거리지?> 평화와 사랑과 화해를 말한 것이 도리어 범죄로 몰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베드로는 그 때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
지금이야말로 평화를 합창해야 할 때입니다. 평화의 기도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선포하신 평화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할 때입니다. 전쟁의 칼바람이 부는 이 광야에서, 피 흘리시며 원수 됨의 장벽을 허무신 주님을 <내가 안다!>고 고백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자칫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릴 때, 저 폐허의 잿더미에 앉아 통곡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