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20303m 임직의 원리(딤전 1:12-17)

20130303m

딤전 1:12-17

임직의 원리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 오후에는 임직식이 있고, 임직식 때 여러 목사님들이 오셔서 좋은 말씀을 해주시겠지만, 저도 이 시간 바울이 말씀한 임직의 원리를 잠시 소개하려고 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임직자를 세울 때 어떤 기준에 의해 세우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주님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잘난 순이 아니라 못난 순으로 세우십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이 직접 스카웃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얼마나 훌륭하고 잘났으면 주님이 직접 부르셨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6절입니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 우리가 어느 시설을 찾아갔다고 합시다. 어떤 아이부터 씻기고 먹이겠습니까? 그중에서 가장 불쌍하고 남루한 아이를 먼저 씻기고 먹일 겁니다. 16절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자신이 주님의 극적인 부름을 받은 것은 자기가 잘 나서가 아니라 자기야말로 가장 딱한 죄인 중 괴수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였다고 합니다. 자기는 만삭 되어 나지 못한 덜떨어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우선적으로 부르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가를 보이시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부르고 택하셨음을 보고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하려고 그랬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비로움을 만방에 드러내시기 위해 바울 자신을 택했다는 겁니다. 바울이 잘 나서가 아니라 가장 못 나서 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많이 가진 자, 능력 있는 자를 원하시겠습니까? 가끔 제게 와서 자기 주변에 이런 저런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돈도 많고 능력도 많아서 우리 교회 데리고 나오면 도움이 될 터이니 그 사람을 전도하도록 기도 많이 해달라고 합니다. 돈 있고 능력 있다고 예수를 믿지 않아야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돈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은 교회 나와서 부담이 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교회는 못난 사람이 더 어울립니다. 임직자도 마찬가집니다. 주님은 못난 사람을 임직자로 세웁니다. 그래서 잘 나고 똑똑한 사람을 무색하게 하십니다. 이게 주님의 주특기입니다. 주님이 저런 사람도 택해 권사를 만들고, 저런 사람도 택해서 안수집사를, 장로를 세우시는구나. 주님의 은혜가 대단하다고 하는 그 효과를 주님이 바라십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자기를 죄인 중 괴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절대 과장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울은 죄인 중 괴수였습니다. 바울이 부를 때는 스데반의 순교 직후입니다(행 7).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맨 앞에 바울이 서 있었습니다. 바울이 사람들을 선동했고, 바울이 앞장서서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 직후에 주님이 바울을 부르셨습니다(행 9). 왜 진작 부르지 않으셨을까요? 제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 있다고 해도 사람 죽이는 일만 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평생 겸손했습니다. 왜냐면 내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살인자라는 짐을 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은 목사 아니면 못 살 사람들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유명하다는 목사 등등 모두는 결격사유가 많습니다. 치명적인 약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꼭 그런 사람을 쓰십니다. 아무 짝에도 못 쓸 덜떨어진 자들을 택해 세우십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인생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 이하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못난 자 순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임직하시는 안수집사님, 권사님들도 잘 나서 뽑힌 게 아닙니다. 내가 못 나서 주님이 나를 부르셔서 오늘 임직하게 하셨다는 해석이 옳습니다. 


다음은 주님이 절대 능력이 아니라 자세를 보십니다. 이것도 중요한 임직의 원리입니다. 흔히 우리는 임직자들에게는 주님이 남다른 능력을 기대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능력보다는 자세를 원하십니다. 초대 임직자요 원조 임직자인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고, 지혜가 충만해서 누구도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뛰어난 능력을 한 번도 발휘해보지 못하고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지 금방 돌 맞아 죽을 사람에게 왜 많은 능력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스데반에게 바라신 것은 능력이 아니라 자세였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하는 용서와 사랑의 자세, 끝까지 천사 같은 얼굴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기도의 자세를 본 것입니다. 그의 자세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이것은 자세입니다. “누구든지 낮아지는 자가 높아지리라.” 이 또한 자세입니다. 능력이 아니고 재주가 아니고 결과가 아니고 성과가 아닙니다. 자세입니다. 주님은 능력을 기대하시지 않습니다. 기본을 바라십니다. 주님은 상식을 중요시 하십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자세가 틀렸으면 틀린 겁니다. 요즘 새 정부 인사청문회를 보십시오. 인사청문회는 능력보다는 자세, 기본, 도덕성을 봐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 있으면 뭐합니까? 그런 사람들 고위 공직자가 되면 다 사욕을 취합니다. 공직에 능력은 필요 없습니다. 정말 국민들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든 운동이 다 자세에서 나옵니다. 자세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도 발전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성적만 내려고 하지, 기본기는 무시합니다. 여러분 실력은 자세에서 나옵니다. 저 역시도 임직자들께 원하는 것은 실적이나 능력, 재주가 아니라 자세를 부탁합니다. 년 초에 제직을 임명할 때 제가 부탁하면 많은 분들이 펄쩍 뜁니다. 자기는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능력보다는 최선을 다 하려는 자세를 주문한 것입니다. 언제나 느끼는 아쉬움은 능력이나 재주, 실적이나 성과가 아니라 자세요 기본입니다. 주님 말씀 가운데도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 비유는 기본, 자세를 교훈한 말씀입니다. 풍수가 나고 바람이 풀어도 안 무너지는 집을 세우려면 기초가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현란한 능력으로 집을 지었다 해도 모래 위에 지으면 한 방에 갑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저는 임직자들이나 성도들께 절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제가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자세와 기본만큼은 존중하자는 것입니다. 특별나거나 대단한 것 하지 말고 기본적 상식만큼은 무시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자세, 기본을 존중하고 상식이 통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임직자들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 이하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이 말씀은 가장 좋은 것은 빨리 죽어 하나님과 천국에서 함께 사는 것인데, 그러나 잠시 죽는 것을 유보하고, 나는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오늘 안수 받고 임직하시는 분은 기억력이 살아있는 한 이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내가 먼저 영광을 받고 그 일부가 주님께 돌아가는 것은 용납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내가 전적으로 희생하거나 손해 보는 일이라면 용납이 안 됩니다. 그러나 이제 안수집사나 권사 쯤 되면 더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의 기쁨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저에게 어느 날 계시처럼 다가온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일이 쉽다면야 무엇 때문에 부모를 미워하고 처자를 미워하라고 합니까? 그만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임직자들은 앞으로 남은 자신의 생애가 개인적 삶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한 공적 삶이란 사실을 엄숙히 인정하고 공인하셔야 합니다. 옛날처럼 사시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는 오직 내 영광을 위해 살았지만 지금부터는 아닙니다. 로마서 14장 8절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것이 임직자들의 진실한 고백이고 앞으로의 삶이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절대 우리 희생을 댓가로 당신이 득을 보자고 하는 분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복을 위해서입니다. 부디 오늘 임직하시는 안수집사, 권사님들은 물론이고 모든 제직, 성도들께서도 이런 주님의 뜻과 임직의 기본원리를 잘 이해하시고 앞으로 여러분의 사역과 삶이 더욱 복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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