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24m 사랑의 사도(요 1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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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4m
요 19:25-27
사랑의 사도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주님이 십자가에 달린 상태에서 모친 마리아를 사랑하신 제자에게 부탁하시는 대목입니다. 26절 이하를 다시 봅니다.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 나오는 사랑하시는 제자는 누구입니까? 다른 제자는 다 달아났는데, 누구 길래 주님의 최후까지 지키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3장 21절 이하입니다.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최후만찬 석상에서는 아예 눕듯이 주님 품에 안겨 있습니다. 그래서 수제자라는 베드로마저도 그를 통해 누가 주님을 팔려고 하느냐며 주님께 묻고 있습니다. 누구이기에 주님 품에 안겨 있었고, 주님 십자가까지 지켰고, 또한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익명을 갖고 있습니까?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다른 사도들의 이름은 다 나오는데 유일하게 요한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이 8번 정도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런 표현이 자기 이름보다 더 자기로서는 신앙고백적 호칭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익명을 더 선호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자기 이름 대신에 익명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가 붙인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이외에도 남이 붙여준 익명도 있습니다. 사랑의 사도입니다. 요한이 왜 사랑의 사도입니까? 누구보다도 사랑이 충만해서 그렇습니다. 요한은 신구약 성경 저자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정의한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도 썼고, 요한 1,2,3서도 썼습니다. 그가 쓴 요한1서 4장 8절과 16절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는 말년에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그러다가 밧모섬에 유배를 가서 거기에서 요한계시록을 쓰고, 다시 복귀합니다. 그때는 이미 거동조차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요한을 들것에 태워 강단 높은 의자에 앉혀 놓으면, 거기에서 꺼져가는 목소리로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는 말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 노사도의 꺼져가는 외마디를 듣고 항상 온 교회가 눈물바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지금도 요한을 가장 좋아합니다. 어느 나라나 요한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습니다. 영어로는 John, 독일어로는 Johannes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괴테, 바하 등이 다 요한입니다. 불란서는 Jean입니다. 칼빈도 장 깔뱅(Jean Calvin)입니다. 스페인도 Juan이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러시아도 요한이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러시아는 Ivan이라는 이름이 요한입니다. 우리나라도 요즘 요한이라는 이름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전에는 우리나라 개 이름도 독구, 메리, 아니면 쫑이었는데, 쫑이 요한입니다.
그러면 요한이 어째서 사랑의 사람, 사랑의 사도가 되었을까요?
그는 먼저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굳이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명명한 것은 그것이 자기의 가장 정직한 고백이고 숨김없는 간증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제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습니다. 오죽하셨으면 주님이 그를 품에 안았습니다. 요한1서 4장 10절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4장 19절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이 본래 사랑 많은 사람은 아니었고, 호전적이었습니다. 한 번은 주님이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는데, 거기 사람들이 못 지나가게 하니까, 요한 형제가 당장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 사람들을 다 쓸어버리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붙여준 별명이 “보아너게”입니다.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주님이 지어주었습니다. 사랑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후에는 위대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먼저 사랑을 많이 받아야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무조건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야 내 자식도 나가서 남을 사랑하며 삽니다. 자식이 부모 사랑을 못 받으면 사회생활하면서도 남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찬송가 85장도 그렇습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맞는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봐야 그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끔찍한 사건이 많습니다. 엄마가 핏덩이 아기를 내다버리고, 아들이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고, 부부가 상대의 시체를 다락방에 유기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이게 다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사랑을 못 받아서 우리의 인간성이 이토록 황폐해졌습니다. 황폐해진 인간성은 무슨 일인들 저지르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사랑을 주지 않으며 키운 자식은 사회적 흉기를 키우고 있는 겁니다. 여차하면 드러납니다. 부디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되십시오. 먼저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십시오. 저 하늘의 달이나 별도 먼저 햇빛을 충분히 받아야 빛을 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사랑을 풍성히 누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남에게도 반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넉넉한 주님의 사랑의 세례를 받아야 우리도 요한처럼 이 시대에 사랑의 사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은 주님의 그 사랑에 대한 채무자 의식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6절을 보면,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전격 체포되니까 다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때 요한도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아래에 있습니다. 12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의 최후를 지키고 있습니다. 달아났다 가슴을 치며 되돌아 온 것입니다. 왜냐면 그동안 주님께 받은 사랑에 배신할 수 없어서 다시 십자가 아래로 돌아온 것입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거기에 막달라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그녀도 누구보다 주께 진 사랑의 빚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는데 주님이 구해주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저버릴 수 없어 임종을 지키고, 무덤을 확인하고,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다 주님 사랑에 대한 채무의식 때문에 남다른 사랑의 제자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다 주님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죗값을 당신의 피로 갚아 주셨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던 존재들인데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우리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한시도 주님의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야말로 사랑에 빚 진 자가 되어 그 빚을 갚는 심정으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우리도 사랑의 사도가 됩니다.
요한은 주님이 사랑하신 사람들을 그도 열심히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은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자기 모친을 부탁하신 그 순간부터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후에 팔레스틴을 떠나 소아시아 에베소 교회를 섬기며 목회할 때도 거기로 마리아를 모시고 갔습니다. 거기에 가면 요한의 무덤도 있고 마리아 하우스도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마리아를 끝까지 모시며 사랑하고 효를 다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사랑하신 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사랑하신 사람들을 나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주님이 사랑하신 사람들을 내가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게 어찌 진실한 사랑이겠습니까? 주님은 다 사랑하셨지만 저는 못 합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주님이 용서하셨으니 나도 용서하고, 주님이 사랑하셨으니 나도 사랑한다는 게 맞습니다. 주님은 못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창녀들, 환자들, 과부들, 세리들을 다 동정하시고 넓은 가슴으로 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작은 자들을 찾아다니고 품어야 우리가 이 시대의 사랑의 사도요 전도사인 것입니다. 요한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십자가상에서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네가 모셔라는 겁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분은 다 우리의 어머니고 형제고 자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섬기며 모시고 효를 다하라는 겁니다. 이 말씀에 우리가 진심으로 공감하며 우리 삶을 통해 실천해야 정말 우리가 사랑의 사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가 요한의 후예들이요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사랑의 절기인 사순절에 여러분의 심령과 삶에 주님의 사랑이 풍성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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