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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7m 불혹(不惑)은 없다(마 4:1-11)

20130217m

마 4:1-11

불혹(不惑)은 없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부활절 전 40일 간의 고난기간인 사순절은 주님의 40일간의 광야 고행, 광야 금식기간에 그 근거를 둡니다. 그래서 사순절 첫째주일에는 거의 이 본문을 택해서 설교합니다. 주님이 40주야를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치명적인 유혹을 당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은 이미 주님의 마음이 흔들렸다는 뜻인데, 주님 같은 분이 어떻게 마귀에게 유혹을 당하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공자님은 마흔을 불혹(不惑)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주님은 마흔이 되려면 10년은 더 있어야 하니까 수양이 부족해서 마귀에게 유혹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불혹(不惑)은 없습니다. 마흔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인생은 유혹의 연속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처음 시작을 유혹 받으셨는데, 마지막에도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큰 유혹을 받으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 이하입니다.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오죽 유혹이 심하면 죽게 되었다고 합니까. 그러나 주님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넘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교회 89세 된 권사님이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 순간에 눈을 뜨고 잔뜩 찡그린 얼굴로 손을 잡고 기도하던 목사님께 ‘목사님, 왜 이렇게 죽음이 두렵지요? 왜 이렇게 천국 갈 자신은 없고 무섭기만 하지요? 왜 이렇게 제가 외롭지요? 저 지옥가면 어쩌지요?’ 평생을 경건하게 살아온 권사님이신데 죽음을 앞둔 순간에 그렇게 떨고 계시더란 겁니다. 목사님이 난감해서 ‘권사님, 걱정 마십시오. 주님도 돌아가실 때 외롭고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운명하셨습니다. 마귀가 지금 권사님을 시험하는 것이니 이기십시오’ 하고 말했더니, 권사님이 엷은 미소를 띠시며 소천하셨다고 합니다. 주님이 당하신 유혹은 실제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시험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시험은 주님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주님이 선구적으로 그 시험을 이기셨고, 우리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40일을 금식한 후에 인간 한계상황에서 이 모든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주님의 첫 번째 시험은 이렇습니다. 3절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시험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진 분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었기에 안 드시면 배고팠고, 안 마시면 목말랐습니다. 그런 분이 광야에서 40주야를 금식했습니다. 우리는 2,3일만 금식해도 냄새에 민감해집니다. 그러니 40일을 굶었으니 한계상황입니다. 이런 틈을 마귀는 놓치지 않고 광야에 널린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잔인합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은 제가 더 잘 알면서 교활하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주님으로서는 꼼짝없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주린 배도 채우고,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단호히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주님의 절실한 생존의 조건은 떡인데, 보란 듯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자신을 증명하고 주린 배도 채울 수 있는데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그 이유는 4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주님이 당하신 첫 번째 시험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떡으로만”입니다. 마귀가 40일을 굶주리신 주님께 떡 절대주의, 물질지상주의, 맘모니즘을 강요한 것입니다. 떡이면 다 된다는 마귀에게 주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지금도 마귀는 끊임없이 떡이 전부라고 합니다. “떡으로만”입니다. 떡만 많으면 누구나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떡에 혈안입니다. 어떻게든 돌로 떡을 만들려고 합니다. 다 마귀에게 코가 꿰어서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은 다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에서가 팥죽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파우스트처럼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습니다. 우리는 에서의 후예들입니다. 떡이라면, 팥죽이라면 뭐든 다 팔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양심도, 신앙도, 영혼도, 하나님도 다 팔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짐승들에게는 떡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떡을 필요로 하는 육체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는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현실은 모두가 떡에 미쳐서 돌로 떡을 만들려고 갖은 억지를 부리고 온갖 반칙을 다 씁니다. 어떻게 돌로 떡을 만듭니까? 우리 사회의 온갖 비리, 뇌물, 한탕주의, 불법, 편법 ... 이 모든 게 돌로 떡을 만들자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먹을 것을 잔뜩 쌓아놓고도 그러는데, 주님은 40일간을 굶고 나서도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을 칼처럼 물리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이 말씀을 우리는 뼈에 새겨야 합니다. 떡을 찾다보면 결국 우리는 영혼을 팔게 됩니다.


두 번째 시험은 5절 이하입니다.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이것은 정신적인 시험입니다. 명예, 허영심, 영웅심을 유혹하는 시험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공생애를 앞둔 시점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주님의 공생애는 활짝 펼쳐졌을 겁니다. 스타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마귀의 유혹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니 천사가 받아 줄 것인데 뭔 걱정이냐는 겁니다. 이번에도 뛰어내려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또한 주님으로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안 뛰어내리십니다. 왜냐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누구나 반드시 죽기 때문입니다. 번지점프를 하면 살아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살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할 일이 없어 우리의 천한 허영심이나 영웅심을 채워주시려고 천사들을 보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우리를 사뿐히 받아주시겠습니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그냥 죽게 놔두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데 어디 받아주나 안 받아주나 보자고 해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 모독입니다. 상대의 사랑을 시험하려는 것은 이미 깨진 사랑입니다. 의심이 전제되어 있으니 자꾸만 확인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불신이 전제된 것입니다. 주님이 그때 뛰어내리셨다면, 만약 멀쩡해도 이미 그 관계는 깨진 겁니다. 전에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한다며 농약 마시고 쥐약 마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장난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유치한 인간적 만용입니다. 이 장단에 하나님은 절대 춤추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공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똑같은 시험을 당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더러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당장 내려오라고 합니다. 우리 같으면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왔을텐데 주님은 끝까지 안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 믿음의 대상이지 시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이지 확인이나 증명의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면서 자꾸 내 사랑을 시험하려들면 얼마나 불쾌합니까. 사랑은 신뢰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쾌한 노릇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모욕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시험입니다. 8절 이하입니다.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가장 치명적이며 영적인 시험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두 번째 시험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이 갈수록 수준이 높습니다. 여러분, 이 유혹의 고도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광야였습니다. 지상입니다. 그 다음은 성전 꼭대기입니다. 마지막 시험은 높은 산입니다. 이게 당시 주님이 당하신 시험의 난이도입니다. 점점 더 높아집니다. 점점 더 유혹이 어려워집니다. 마지막 시험이 얼마나 유혹적입니까? 눈앞에 펼쳐진 세상의 부귀영화가 한 순간에 내게 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조건도 너무 간단합니다. 눈 한 번 딱 감고 내게 절하라는 겁니다. 식은 죽 먹기보다 쉽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 마지막 시험 역시 물리치십니다. 추상같이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첫 번째 시험은 “떡으로만” 이라는 거짓된 절대를 물리치셨는데, 마지막 시험에는 “하나님만”이라는 절대를 내세우십니다. 우리가 왜 자주 시험에 빠집니까? “하나님만” 이라는 절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유혹에 시달리고, 마귀에게 자주 절하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죄악에 빠진 이유가 “하나님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처럼 “하나님만”이라는 절대 신앙을 붙잡으십시오. 이게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마귀의 시험에는 배팅이나 내성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같은 시험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도 유혹한 마귀인데 우리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루 24시간 동안 우리가 얼마나 자주 미혹에 넘어집니까? “하나님 절대”를 놓치면 우리 인생은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당하는 시험을 선구적으로 이기신 주님이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돕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시험에 이길 수 있습니다. 마귀의 물질적, 정신적, 영적 시험을 주님이 시범을 보이신 말씀으로, “하나님만”이라는 절대적 신앙으로 물리치고 이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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