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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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세상에 알려진 고양시 세 자매 얘기는 우리 모두를 경악하게 하고 너무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그 다세대주택에만 18가구가 산다는데 지난 2년간 세 자매가 그렇게 반지하 단칸방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안 주민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비틀거리며 일자리를 구하러 나선 19살 첫째가 어느 목사님이 운영하는 인쇄소라도 찾았으니 망정이지 자칫 다 굶어 죽을 뻔했습니다. 둘째의 허리디스크, 셋째의 대퇴부 골절, 둘째 셋째의 극심한 간질에다 셋 모두 아사직전의 영양실조였다니… 아, 거지같은 세상! 이게 2013년 2월 현재 비정한 우리 사회의 어김없는 자화상입니다.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상은 참 인간적입니다. 슬퍼하고 사랑하고 툭하면 진노하고 징계하고 후회하는 변화무쌍한 신입니다. 사실 이런 신의 모습은 동양적인 신관에서 보면 매우 저속한 것입니다. 하늘은 자고로 초연해야 합니다. 인간의 슬픔이나 기쁨, 패배나 승리 따위에 일희일비하는 존재라면 이미 신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끝끝내 신비에 싸여 있는 존재가 바로 동양권의 신입니다. 인간이 도통한다는 것도 바로 그런 신과 같은 초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은 여간 범속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하나님의 그 비속성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게 곧 인간과 더불어 산다는 증거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마치 엄마와도 같습니다. 품어 주고, 울면 달래고, 끝까지 고집을 피우면 매를 들고 그러다가도 다시 끌어안는 엄마, 그것은 전적으로 자식을 중심으로 사는 엄마이기에 그렇습니다. 엄마가 변덕스럽다면 그것은 오직 어린 자식과 더불어 살기 때문에 오는 변덕일 뿐입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은 그런 하나님이 아예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합니다. 즉 주님이 바로 순수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한 번은 그분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다 시장하고 목이 말라 야곱의 우물가에 걸터앉았습니다. 분명 그는 초월자였으나 배고픈 줄도 알았고, 피곤과 목마름도 느낀 너무나도 인간적인 초월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마침 물 길러 나온 한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며 <네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다면 네가 도리어 그에게 물을 구했을 것이고 그가 네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생수를 줄 수 있는 분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게 물을 구하고 있는 나그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한 속에서 무한을,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앞에 내민 손을 외면하고 초월자를 찾는 것은 다 구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의 도피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분명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고, 병든 자를 돌아보고, 옥에 갇힌 자를 찾아보는 것, 즉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5:35-40).
<신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내 편의 신이!> 스스로 무신론자, 허무주의를 자처한 어느 시인의 고백입니다. 그는 허무주의를 자처함에도 자기의 소원이 그렇게도 분명할 수가 없습니다. <내 편이 되어 달라>는 것은 이미 자기의 욕구가 그만큼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독거미 같은 에고이스트입니다. 그는 지금 나와 마주친 이웃을 회피하기 위해 일부러 소경이 된데 불과합니다. 먼 데서 찾지 마십시오. 지금 내게 물을 좀 달라 하는 나그네에게서 주님을 만나십시오. 이번 설에도 주님은 주린 자로, 목마른 자로, 헐벗은 자로, 병든 자로, 구걸하는 나그네 행색으로, 피골이 상접한 고양시 세 자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내게 물을 좀 달라!> 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