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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7m 통렬한 풍자(눅 14:16-24)

20130127m

눅 14:16-24

통렬한 풍자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본문은 주님이 어느 잔치자리에서 말씀하신 잔치비유입니다. 그래서 설득력이 더 있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돌립니다. 마태복음 22장에도 비슷한 비유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라고 합니다. 잔치 당일이 되어 주인이 종을 보내 사람을 청합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4절에는 좀 더 자세하게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두 번 초청했다고 합니다. 일단 잔치를 알리고, 당일에 한 번 더 초대하는 겁니다. 


그런데 두 번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놀랍게도 하나같이 이런 저런 핑계로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절 이하입니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이게 다 그들이 잔치를 거절한 이유입니다. 다 그럴 듯합니다. 다 산 것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경제력이 허락하는 만큼 일부다처가 보장되었으니 결혼도 여자를 돈으로 산 것입니다. 본문의 결혼한 사람도 초혼은 아닐 겁니다. 마태복음의 이 대목은 더욱 노골적입니다. 돌아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의 이 비유가 외경인 도마복음에도 나오는데, 첫 번째 사람은 상인을 만나 거래할 일이 있어서 안 된다고 했고, 둘째 사람은 집을 사러 가야 한다고 했고, 세 번째 사람은 친구 결혼 때문에, 마지막 네 번째 사람은 토지 소작료를 받으러 가야 해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정경이든 외경이든 모두 사고파는 일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소유 때문에 잔치 초대에 응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사고파는 일에 대한 주님의 통렬한 풍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초대해도 냉담하고 무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밭 사고, 소를 사고, 결혼하는 일은 다 소중한 우리의 일상사입니다. 더구나 결혼은 인륜지대사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왜 이토록 신랄하게 고발합니까? 그게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천국잔치에 응하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주가 긴박하긴 하나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천국잔치가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하는 일이 우리 삶의 제1순위 아니 0순위라고 합니다. 열심히 장사 하십시오. 열심히 사업도 하십시오. 열심히 밭도 소도 집도 사고, 결혼도 하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런 것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천국이 목표이고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게 내 인생 최대의 과제입니다. 그럼에도 지금도 숱한 사람들이 돈 받으러 하고, 장사하러 가고, 결혼식에 가느라 천국잔치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주님이 통렬하게 풍자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연하게 밭과 소와 결혼으로 천국과 맞바꾸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태연하게 자신의 장자권을 팥죽과 맞바꾸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리석고 불행한 일입니다. 옛날 노아 때도 그랬습니다. 마태복은 24장 38절 이하입니다.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결국 홍수가 나서 다 멸하기까지도 그 심판과 비극의 의미를 모르고 죽었습니다. 자기들이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지를 모르면서 수장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가장 무서운 말씀은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도 밭 사고, 소를 사고 하다가 이유도 모른 채 멸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의식주가 아무리 소중해도 천국잔치와 바꾸지 마십시다. 이보다 더 딱한 영혼은 없습니다.


드디어 주인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다시 이렇게 명합니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그런데도 여전히 자리가 차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전에 청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역사적으로 주님이 맨 처음 초대한 사람은 유대인입니다. 다음에 청함을 받은 사람은 제1세계 기독교 국가입니다. 그럼에도 자리가 차지 않자, 변방 산울가 사람까지 청합니다. 제3세계입니다. 제1세계의 피선교국들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금도 자리가 다 차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주인의 잔치자리가 안 찼다고 합니까? 그 비밀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의 이 비유의 마무리 부분인 22장 14절입니다. 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그에 응한 사람은 소수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10명 청함을 받으면 그 중 겨우 2사람만 응합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청함은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 청함은 다 받습니다. 그러나 청함 받은 사람이 다 택함 받은 사람은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 청함 받은 사람은 많고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고 하셨습니다. 왜 청함 받은 사람의 이유가 분분합니까? 달리 말하면 택함을 못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잔치자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택함을 못 받은 게 아니라, 택함을 못 받았기에 주님의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자는 지극히 소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뜻대로 택함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구원 받지 않고서는 우리가 주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은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물증입니다. 본문의 주인공들처럼 그럴 듯한 핑계를 대고 빠져나갑니다.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를 해도 택함 받은 자가 아니면 그 초대에 응할 수 없습니다. 택함 받았기에 우리는 그 초청에 응한 것입니다. 왕의 잔치 자리가 비어 있는 이유는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종들로서는 택함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기에 일단 누구나 초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도 이 초대를 통해 소수의 택한 자를 가리신다고 합니다. 종들이 택함 받은 자들을 알면 그 사람만 초대하면 되는데, 모르기 때문에 무차별로 초청장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택하신 자가 가려집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라고 합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오늘 우리 시대입니다. 이때는 아무리 초대해도 안 오니까 강권하여 강제적으로 초대하라는 겁니다. 세상문화에 너무 동화되어 초대를 해도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조차도 거기에 잘 응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강제하는 겁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가 전도하지 않더라도 제 발로 걸어나와야 할 것 같은데, 전도를 해도 거기에 응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마지막 시대의 모습입니다. 너무 깊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며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 문화에 너무 적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강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 시대 종들의 아픔이고 운명입니다. 전도하는 게 너무 거북하지 않습니까? 순순히 응하지 않으니 죽을 맛 아닙니까? 그러나 마지막 시대를 사는 종들의 숙명입니다. 주님은 강제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택한 자들이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도 거의 강제로 끌려나왔고, 40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며 애굽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습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강권하는 캠페인을 벌여왔으나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올해도 다시 결의를 했습니다. 한 가정이 한 가정,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구원하자는 <119 전도> 캠페인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이끌어 내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보람되고 가치 있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