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20m 넉넉히 이기리라(롬 8: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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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0m
롬 8:26-39
넉넉히 이기리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신구약 66권 성경을 우리는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 신구약 성경을 다 읽을 수 없다면 로마서를 읽어야 합니다. 로마서를 다 읽기에도 시간이 없다면 로마서 8장을 읽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26절 이하는 8장 중에서도 핵심입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위로를 줍니다.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인간의 자유의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 행위로 우리를 택할 수도,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입니다. 똑같은 소재로 천한 그릇을 만들 수도, 값지고 귀한 도자기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왜 나는 버리고 저 사람은 택했습니까? 왜 나는 택하고 저 사람은 버렸습니까? 이렇게 항의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은 안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맞물려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물론 개인이나 교단에 따라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더 두느냐의 차이는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무게 중심을 두는 쪽은 알미니안주의에 속한 부류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무게 중심을 두는 쪽은 장로교 개혁교회입니다. 칼빈주의 쪽입니다. 그래서 흔히 교리는 장로교가 좋고 신앙은 알미니안주의가 좋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자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보장된 복이 있습니다(28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선을 이룬다는 말은 아름다운 결말을 보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과정은 기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최종적인 결론은 더 없이 복되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온갖 일을 다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선이 되고 복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보장된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복이 37절에는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28절보다 37절이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좀 더 분명하게,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우리는 현실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넉넉한 이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이런 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막연히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올해도 필연적으로 넉넉히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근거는 이것입니다.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언어와 주제로 기도해야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기도하긴 하지만 그게 정말 내게 복이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의 무한하신 연민의 기도로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다음은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자기 아들을 바꾸지 않을 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지 않겠습니까.
34절도 보십시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선구자이십니다. 주님은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장 잘 아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에 대해 우리가 이긴다는 것입니까? 우선 우리의 삶에 필요한 현실적인 모든 것을 이깁니다. 32절 하반절입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현실적인 모든 것입니다. 의식주, 직장, 건강, 자녀들의 학업 문제 모두입니다. 올해는 지구촌의 경기가 악화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우리 생활도 그만큼 팍팍할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쉽게 현실에 투항하지 마십시오.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이 우리의 현실적인 모든 필요를 채우십니다.
다음은 죄와의 싸움에서도 이깁니다. 33-34절입니다.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를 고발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사탄 마귀입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좌절하게 하려고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주특기입니다. 단죄, 고발, 참소, 정죄가 그의 주특기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더는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더는 죄인이 아닙니다. 죄를 지어도 죄인이 아닙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가장 용납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 내가 죄를 지었는데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왜 우리가 죄인이 아니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이라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마귀는 뒤따라 다니며 계속 정죄하고 참소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교리적으로 <칭의>(稱義, Justification)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죄인임에도 의인으로 불러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공명정대한 분입니다. 공의롭습니다. 그런 분이 죄를 짓는데도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고 우기십니다.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당신의 피값으로 우리 죗값을 이미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죗값을 물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주님의 그 보혈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피가 보혈(寶血)인 것입니다.
34절을 다시 보십시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주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주님이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죗값이 그분의 피값보다 더 크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피값은 우리의 죗값을 갚고도 남았습니다. 그래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금방 죄를 짓고 돌아섰는데 왜 내가 죄인이 아니란 말인가? 이것은 우리의 고뇌일 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그 보혈이 우리 죗값을 다 지불하고도 남았기 때문입니다. 일사부재리 원칙이 있습니다. 한 번 죄를 물으면 두 번 다시 그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확인을 가지십시오. 죄인이지만 더는 죄인이 아닙니다. 죄책에 사로잡히는 것은 마귀가 주는 참소입니다. 죄책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를 마음대로 짓고 살아도 됩니까? 아닙니다. 죄가 내 신분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 신분에 죄가 걸맞지는 않습니다. 서민이라면 다 넘어갈 일도 고위공직자들은 개망신 당하기도 하고, 공직에 진출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왜 그 사람에게 그런 일이 문제가 됩니까? 그 신분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요구되는 도덕지수도 높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말끝마다 욕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입에 욕을 달고 살아 보십시오. 그게 어울립니까? 죄는 믿는 자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마치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입에 욕을 달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죄를 멀리하라 죄를 피하라고 하는 겁니다. 죄를 지으면 우리 신분이 해소되거나, 받은 구원이 취소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엄격히 말하면,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영원히 죄에 대해 이겼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라고 합니다. 더는 죄와 인연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내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내가 더는 죄를 안 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가 내 운명의 변수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를 이겼습니다.
장래 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깁니다. 사실 우리는 한 치 앞을 모릅니다. 우리를 두렵고 불안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입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구촌 모두가 최악의 경기 가운데서 숨죽이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다 두려워하는 그 미래의 불확실성도 절대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절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지 못합니다. 38절 이하입니다.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미래의 불확실성, 내일이 우리에게 주는 불확실성의 위협도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이 말씀보다 더 지독하고 무서운 말씀은 없습니다. 사망도 생명도 천사들도 공중 권세를 잡은 자들도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는 말씀을 어디에서 들으며 찾을 수 있습니까? 확신을 가지십시오.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 올해도 이 말씀을 가슴에 품고 늘 승리하며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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