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외아들

도대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 명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언어도단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아무런 대꾸도 반발도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모리아 산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이게 과연 이해됩니까? 절규하고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새우며 고뇌해도 시원찮을 마당에 ….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토록 처절하게 읍소하던 그가 어째서 제 자식의 운명 앞에서는 이토록 냉혹하더란 말입니까? 결코 짧지 않은 사흘간의 여정이 끝나고 드디어 모리아 산에 당도했습니다. 두 사환과 나귀는 아래에 두고 이삭만 데리고 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데 이 장면도 충격적입니다. 아들을 불태울 나무를 본인의 등에 지운 것입니다. 뭔가 낌새가 이상했던지 이삭이 갑자기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 있나이까?> 무겁게 짓누르던 침묵을 깨뜨린 이삭의 이 말에 답한 게 저 유명한 아브라함의 <여호와 이레>입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사실 아브라함이 그의 외아들 이삭을 죽인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아비됨을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인륜대계를 무너뜨리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2:17-18). 따라서 절대 죽이면 안 되는 게 바로 이삭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를 죽이는 것은 곧 이스라엘을 죽이는 것이요 인류의 미래가 끝장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제 자식을 잡으려고 칼을 뽑아 목에 들이댔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살려주시겠지 하며 쇼를 한 것도, 실성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신약 히브리서는 당시 아브라함에 대해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기 때문>(11:19)이라고 했는데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외아들을 제 손으로 잡아 바치면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는 그런 절박한 소망이 이뤄질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이 죽은 자기의 외아들을 다시 살리사 당초 그가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거란 믿음에 목을 내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시련에 의해 심판을 받습니다. 모든 게 순탄할 때는 마치 주님의 분신 같던 사람도 시련이 닥치면 쉽게 분노의 화신이 되거나 절망의 화신이 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그는 외아들의 목을 따야 하는 환장할 순간에도 결코 하나님의 그 원초적인 약속과 능력에 대한 신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런 불굴의 신앙에 체념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내세우는 우리들의 삶의 저변에 짙은 패배주의와 절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봅니다. 엄밀히 말해 우리의 삶은 시련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시련이 언제나 외아들의 운명과 직결돼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시련이란 곧 외아들에게 큰 위협이 닥쳤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무너지거나 없어지면 내 인생이 끝장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외아들입니다. 남편, 아내, 자식, 건강, 사업, 직장, 명예, 자존심 …. 그리고 우리는 자주 이 외아들을 번제단에 바쳐야 하는 참담한 현실에 내몰립니다. 여기에 바로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을 배워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제 외아들을 죽음의 제단에 바치면서도 <죽어도 산다, 죽은 이도 하나님은 다시 살리신다>는 믿음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외아들도, 자신도 새롭게 찾은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아브라함은 분명 자기의 외아들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신앙을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실패하잖습니까? 믿음도 좋고, 하나님도 좋지만 백세에 얻은 외아들만큼은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은 하나님도 외아들도 다 잃어버립니다. 부디 아브라함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끝까지 눈에 보이는 외아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신앙에 섬으로써 결국 승리했습니다. 이는 실로 위대한 사실이며 우리가 그 같은 믿음의 유산을 가졌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묻습니다. 

<외아들이냐? 하나님이냐?> 이제 당신이 답할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