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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30113n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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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30113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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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눅 10:30-37</p>
<!-- paragraph:p0003 -->
<p class="p1">너도 이와 같이 하라</p>
<!-- paragraph:p0004 -->
<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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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7 -->
<p class="p1">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이것은 실화라기보다는 주님의 창작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구조는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그래서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중요합니다. 먼저 제사장이 등장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유대 사회의 핵심 리더입니다. 유대 사회는 어차피 종교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레위인도 성직자입니다. 제사장을 도와 성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업무를 감당합니다. 심지어 성가대도 레위인이 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어거스틴의 해석대로 당연히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당시 사회의 중심이었던 세력들을 신랄하게 고발하신 것입니다. 어느 사회나 그렇듯이 강도 만난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강도 또한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 당시 그 사회의 핵심 세력이었던 유대교는 전혀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직무유기를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시나리오를 쓰셔서 고의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을 등장시켜 성토하신 것입니다. </p>
<!-- paragraph:p0008 -->
<p class="p2"><br></p>
<!-- paragraph:p0009 -->
<p class="p1">원래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마리아인을 &lt;개&gt;라고 불렀습니다. 원수지간입니다. 지금 호남과 영남 사람의 갈등은 그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아마 유대인이었을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역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원수지간인 사마리아 사람이 그 유대인을 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마지막 절을 보면, ‘가서 너도 이 같이 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지 못할까요? 주님의 당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할까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강도 만난 사람을 구원하려면, 내가 일정 부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게 용납이 안 되어 그렇습니다. 희생을 하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못 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너도 가서 이렇게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p>
<!-- paragraph:p0010 -->
<p class="p2"><br></p>
<!-- paragraph:p0011 -->
<p class="p1">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이웃을 구원하려면 어떤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까? 우선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을 포기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것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만약 이 사마리아인에게 어떤 편견이 있었다면, 이게 가능했겠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 만난 사람은 유대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면 사마리아인으로서는 샘통이다고 하며 지나칠 법 합니다. 평소에 개 취급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이었음에도 불쌍히 여겼다고 합니다. 그만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래야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많은 가진 사람, 많이 배운 사람은 남을 잘 못 돕습니다. 그 사람들은 편견, 고정관념에 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 지위도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남을 더 헌신적으로 돕습니다. 인간 본연의 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이 어떤 일을 당할 때 그것을 보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도 가진 것이 없음에도 돕습니다. 남을 돕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을 깨야 합니다. 이미 계산이 많은 사람은 남을 도울 수 없습니다. 순수하고 소박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든 강도를 만났다 하면 내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그저 불쌍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분부하신대로 우리도 가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 수 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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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3 -->
<p class="p1">다음으로 수고와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34절입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얼마나 번거롭고 수고스럽습니까. 얼마나 여기에 희생이 따릅니까. 사실 자기도 당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지체하다가 말입니다. 그래서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달아나듯 강도 만난 자를 피해갔을지 모릅니다. 남을 돕기 위해서는 수고를 감수해야 합니다.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우고 자기는 걸어가며 주막까지 데려가 돌봐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수고와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주님이 분명히 ‘너도 가서 이렇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레위인이나 제사장을 만나서 왜 돕지 않고 피해갔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 사람들도 할 말은 있었을 겁니다. 시간이 없어서 라든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져서 라든지의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득이한 이유가 많을 겁니다. 주님은 그 모든 수고와 희생을 감내하고 강도 만난 자를 구해 주라고 하십니다. 이런 이유, 저런 핑계 대지 말고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하라고 하십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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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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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또한 시간과 물질도 손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35절입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데나리온 둘은 적은 돈이 아닙니다. 장정이 이틀 동안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인데 모른 체하고 지나가버렸어도 책임을 묻지 않을 텐데, 사마리아인은 그를 데려다가 정성껏 치료하고 또 주막 주인에게 비용을 치르며 간호해 달라고 합니다. 반드시 물질도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이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겐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사장과 레위인을 등장시켜 신랄하게 고발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지속적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치료하고 두 데나리온 맡긴 것으로 종결하지 않고 계속 돌봐 달라고 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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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7 -->
<p class="p1">여러분, 이렇게 강도 만난 자를 구한다는 것은 많은 불이익이 따릅니다. 현실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희생이 불가피합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사는 게 옳다고 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주님이십니다. 내가 너희 앞에서 무대에 올라 생생하게 시범을 보인 것처럼 너희는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제사장과 레위인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십니다. 희생을 감수하라고 하십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다 보상해 주신다고 합니다. 강도 만난 자들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가집시다. 나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책임적이고 지속적으로 강도 만난 자를 구하고, 돕고, 지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입니다. 특별히 올해는 범교단적으로 작은 이들의 벗이 되자고 합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큰 깨달음과 도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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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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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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