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13m 작은 자에게 한 것(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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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3m
마 25:31-46
작은 자에게 한 것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주님의 유명한 양과 염소 비유입니다. 마지막 심판에 대한 계시입니다. 주님이 이런 비유로 마지막 심판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최후 심판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시대 팔레스틴 목자들은 대개 양과 염소를 함께 방목했습니다. 초지에 함께 풀어 풀을 뜯게 했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양과 염소를 갈랐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털이 길어서 추위에 강하기 때문에 사방이 트인 우리에 넣어야 하고, 염소들은 추위에 약해서 사방이 막힌 따뜻한 우리에 넣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밤이 되면 양과 염소를 가릅니다. 주님 시대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던 팔레스틴의 목축 방식에서 주님이 최후 심판의 모형을 보신 겁니다. 요즘 우리보다는 당시 팔레스틴 사람들이 훨씬 이해가 빨랐을 겁니다. 자기들의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종말에 있을 최후 심판도 이제 이런 방식으로 이뤄질 겁니다. 아직 해가 있을 동안은 모든 사람들이 섞여 삽니다. 그런데 역사의 종말이 닥치면, 그때는 다릅니다. 팔레스틴의 목자들처럼 심판주가 사람들을 둘로 가릅니다.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말입니다. 본문 31절 이하를 보십시오.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러면 먼저 오픈편의 양들에게 하신 심판주의 최후선고를 들어보십시오. 34절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다음은 왼편의 염소들에게 선고하신 말씀입니다. 41절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그리고 본문 마지막 절인 46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왼편의 염소들은 영벌에, 오른편의 양들은 영생에 들어간다는 게 본문의 결론입니다. 두려운 말씀이고 무서운 예언입니다. 역사의 종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다 이해 됩니다.
문제는 양과 염소를 가르고, 의인과 악인을 구분할 때 적용한 기준입니다. 잣대입니다. 무엇으로 양과 염소를 구분했냐는 겁니다. 무엇으로 의인과 악인을 구분했냐는 겁니다. 그 기준이 뭡니까? 35절 이하를 보십시오. 이것은 양으로 분류된 자들에게 심판주가 하신 말씀입니다.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것이 양으로 분류된 근거입니다. 다 선행이고 자선입니다. 구제입니다. 염소로 분류된 자들에 대한 심판주의 말씀도 보십시오. 42절 이하입니다.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이 또한 다 자선과 구제와 동정, 연민입니다.
여러분, 양과 염소, 의인과 악인,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이 기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래 구제나 자선이나 기부 같은 선행이 양과 염소를 결정하고 지옥과 천국을 결정하는 겁니까?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윤리주의, 도덕주의인 유교, 율법주의인 유대교입니다. 기독교는 복음주의입니다. 이 비유의 진정한 뜻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자선, 선행 그리고 구제함으로써 양이 되고 의인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또 자선과 구제와 선행을 안 하면 염소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양으로 구분되는 사람은 평소 이렇게 선행을 행하며 산다는 것이고, 염소로 구분될 사람은 평소에 그렇게 비정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함으로써 양이 되는 게 아니고, 자선을 하지 않음으로써 염소가 되는 게 아닙니다. 양은 처음부터 이미 양이기에 선행을 하며 살고, 염소는 처음부터 염소이기에 비정하다는 겁니다. 사과가 열림으로써 비로소 사과가 되는 게 아닙니다. 사과가 열리기 전에 이미 사과나무입니다. 배나 사과는 결과물입니다. 사과는 그 나무가 사과나무임을 확증해 주는 겁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아서 의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의인으로 태어나기에 구제와 자선을 하며 산다는 겁니다. 열매로 그 사람의 정체를 아는 겁니다. 양들은 이 세상에서 양답게 삽니다. 염소는 이 세상에서 염소답게 삽니다.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말씀입니다. 열매는 결과이지 원인이나 동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어서 구원 얻는 게 아니라 구원 받았기에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존재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이미 양으로 태어났기에 당연한 결과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염소로 태어났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습니다. 내가 양이냐 염소냐는 나의 자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짚어봐야 할 때입니다. 최후 심판 때 심판주 오른편으로 분류될 양들은 태어날 때부터 양으로 태어나기에 평소에 필연적으로 구제하며 산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사과나무는 처음부터 그 종자가 사과나무이기에 거기에는 사과가 열리고, 배나무는 처음부터 배나무이기에 배가 열립니다. 자연의 순리입니다. 그러나 양은 분명히 양인데 양처럼 자선하며 구제하며 착하게 살지 못하고, 도리어 염소처럼 살아가는 존재도 있다는 게 현실입니다. 사과나무인데도 사과를 열지 못하는 나무 말입니다. 우리 농장에도 포도나무도 있고, 대추나무도 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열매가 안 열립니다. 그래서 해마다 실망합니다. 과일나무인데 열매가 안 열리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양입니다. 운명적으로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필연적으로 구제와 자선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게 순리요 상식인데, 그런 열매를 못 맺고 산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양이 양답게 살지 못하면 염소로 전락합니까? 자식이면 부모에게 효를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다 부모에게 효도를 합니까? 부모를 살해하는 자식도 있습니다. 자식이 불효하면 자식이 안 됩니까? 그러나 부모자식이 혈연인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 번 양은 영원한 양이고, 한 번 염소는 영원한 염소입니다. 또한 틀림없이 염소인데 양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염소가 너무 착하게 사니까 양이 됩니까? 그런 염소는 양 같은 염소일 뿐입니다. 양이 염소처럼 살면 염소 같은 양입니다. 양이 못되게 군다고 염소 되는 법은 없습니다. 이게 딜레마입니다. 태풍이 오면 낙과가 생깁니다. 그걸 바라보면서 우는 농부들이 카메라에 잡힙니다. 때가 되면 탐스런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어야 하는데, 몽땅 다 떨어진 것입니다. 농부가 얼마나 좌절하겠습니까? 왜 우리가 양처럼 살아야지 염소처럼 살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기에 농부의 심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양으로 태어났습니다. 양이면 양답게 살아야 하고, 자식이면 부모에게 효를 다해야 합니다. 양답게 사는 것이 바로 구제하고 자선하는 것입니다. 양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면 양이 염소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낙과 밭에 나와 가슴을 치며 우는 농부의 심정이 바로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당연히 사과나무면 사과가 열려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해마다 살펴봐도 열매가 안 열립니다. 그 농부의 가슴에 얼마나 큰 좌절이 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착하게 살아야 양이 되고, 못 되게 살면 염소가 된다는 게 아니라, 양은 양답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작은 자들의 벗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게 양다운 겁니다. 그럴 때 부끄러움 없이 심판대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직헌신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작은 이들의 벗>입니다. 작은 이들의 벗으로 살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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