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05m: 엘리! 엘리!(막 15:33-37) 종려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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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5일 주일낮예배/종려주일
본문: 막 15:33-37
제목: 엘리! 엘리!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주님이 고난주간인 금주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서 운명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성 금요일에 있었던 주님의 운명 대목입니다. 34절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아람어인데, 최후로 남기신 말씀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버리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절규하신 그대로입니다. 주님은 의인으로 죽으셨습니까? 죄인으로 죽으셨습니까? 죄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보통 죄인이 아니라 유사 이래 둘 도 없는 흉악한 죄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떤 죄인도 예수님같은 죄인은 없었습니다. 원래 주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전 인류의 죄를 홀로 지시고 저주받아 돌아가셨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분이 대신 지신 전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요 징계며 저주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절규하신 겁니다. 어떻게 저를 버리며 저주하십니까? 라는 겁니다.
죄인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천국 갑니까? 지옥 갑니까? 아니면 연옥에 갑니까? 의인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의인이 죽으면 당연히 천국 갑니다. 우리를 천국 보내려고 의인도 아닌데 우리를 의인이라 쳐주신 겁니다. 이게 바로 칭의(稱義, Justification)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흉악한 죄인으로 징계를 받아 죽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육신은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 장례가 되셨고, 영은 천국 가신 겁니까? 지옥에 가셨습니다. 육신과 함께 영이 삼 일 동안 무덤에 계신 것도 아니고, 지옥에 가신 겁니다. 이게 교회의 오랜 가르침이고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괴로워하셨습니다. 피눈물과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지난주 본문입니다. 마가복음 14장 33절 이하입니다. ‘심히 놀라고 슬퍼하시며 가능하면 이 죽음의 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든 십자가를 안 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죽도록 고민하셨습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셨으면 피땀을 흘렸겠습니까? 이것은 당신 앞에 닥친 십자가의 죽음이 어떤 것인가를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죄인으로서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하셨습니다.
스위스 바젤 대학의 오스카 쿨만이라는 저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1999년에 작고하셨는데 이분은 구속사 신학의 대가입니다. 그분이 쓴 논문인데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비교한 논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젊은 사람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공인한 종교 외에 다른 종교를 전파한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습니다. 도망칠 수도 있었고,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집행관을 매수해서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고 하면서 죽음 앞에서 여유를 부렸습니다. 제자더러 닭 한 마리 빚진 것을 대신 갚아달라며 담담하게 사약을 받았습니다. 이에 비하면 주님의 죽음은 너무도 처절합니다. 대체 주님과 소크라테스의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죽음의 이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헬레니즘에서 죽음은 비극이 아닙니다. 고대 희랍철학은 철저히 이원론적입니다. 영과 육이 나뉩니다. 영이 참이고 육은 그림자요 어둠이며 거짓입니다. 육은 영을 가두는 감옥일 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구원, 해방, 자유는 영이 육이라는 외피를 벗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철학자는 절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영이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인데 왜 죽음을 마다하겠습니까? 이에 비하면 주님은 너무도 죽음 앞에서 비굴하고 비겁했습니다. 얼마나 살려고 애썼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이 뭘 의미하는지를 아셨기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인류의 죄를 지고 지옥 가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십자가에 못 박히는 육신의 고통 때문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수 많은 순교자들은 사자에 찢겨 죽고, 불에 타죽고 십자가를 지는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으면 천국 가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천국이 아닙니다. 죄인으로서 죽는 죽음이었기에 주님은 지옥을 두려워하셨습니다. 이것이 헬레니즘과 다른 헤브라이즘의 죽음입니다. 헤브라이즘은 영과 육을 분리하지 않고, 영과 육이 같이 죽습니다. 부활도 영과 육이 같이 부활합니다. 영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육이 함께 영원히 삽니다. 그래서 주님은 영적인 죽음이 끔찍해서 지옥이 두려워서 그토록 고민하신 겁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는 성경과 찬송을 다 바꾸었습니다. 어차피 우리 성경은 번역판이기에 계속 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정제됩니다. 개정을 잘못해서 더 개악이 될 수도 있으나, 어쨌든 번역판인 성경은 개정을 거듭해야 다듬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을 개정하며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함께 개정했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계신 찬송가나 성경 제일 앞부분을 보면 개정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이 이번에 잘 개정되었습니다. 음율까지도 신경을 써서 번역을 훌륭하게 했습니다. 원래 사도신경은 원본이 많습니다. 2세기 때부터 전승된 원본이 거의 20개 가까이 됩니다. 그런데 서방교회가 최종적으로 주후 750년에 공인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라틴말로 포르마 레쳅타(Forma Recepta)라고 합니다. 이번에 개정하면서 원본으로 삼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하면, 750년에 최종적으로 공인한 포르마 레쳅타에 있는 한 문장이 빠졌습니다. 한 번 사도신경을 펼쳐 보십시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시어’ 다음에 각주가 붙어 있습니다. ‘지옥에 내려 가셨다가’ 문구가 이번에도 빠졌습니다. 본래 공인 사도신경에는 있는 대목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왜 개정위원들이 그랬는지 살펴보았는데, 신학적 문제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우리 신앙정서상 주님이 지옥에 갔다는 것을 수용하기가 어려워 뺀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는 결정적으로 오류를 범한 것 같습니다. 이번에 개정할 때 제가 가장 기대했던 대목인데, 이번에도 누락되었습니다. 가톨릭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고’라고 표현했습니다. 적나라하게 지옥이라고 하진 않고, 저승이라고 했습니다. 영문이나 독일어로 된 사도신경에는 다 들어가 있습니다. 독일어로 죽음의 세계에 내려 가시어(hinabgestigen in das Reich des Todes)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지옥에 가셨다는 것은 우리가 가야 할 지옥을 대신 가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가야하는데 주님이 내 대신 가셨기에 나는 안 가는 겁니다. 주님이 내 대신 지옥에 가셨음으로 나는 천국에 가는 겁니다. 그래서 절대 빼면 안 되는 문구가 주님이 지옥 가셨다는 문구입니다.
아주 난해한 성경구절로 알려진 베드로전서 3장 18절 이하입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기서 옥은 원어로 ‘풀라케’입니다. 감옥이란 말인데, 다시 말하면 지옥입니다. 노아의 날에 복종치 않던 사람이 가 있는 곳이면 지옥말고 어디겠습니까? 이게 베드로 사도 곧 사도들의 신념입니다. 이것이 형식화되어서 우리에게 전승된 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입니다. 주님이 옥에 가셨다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해야 할 지옥의 징벌을 당신이 대신해서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완전하게 대속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절규하신 최후의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시며 고난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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