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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m 시므온과 안나(눅 2:25-38)

20121216m

눅 2:25-38

시므온과 안나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대강절 셋째주일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성탄을 과거의 사건, 2000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올해도 현재적이고 실존적인 사건으로 체험하느냐 입니다. 성탄은 과거의 사건을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올해도 체험해야 할 사건입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게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본문을 보면, 첫 성탄 때 가장 모범적이고 감격적으로 주님을 만나 뵌 두 사람이 나옵니다.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이 연출하신 성탄이라는 드라마에서 비중있는 역할이 아닙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주연이고, 목자와 동방박사가 조연급이라면 이 두 사람은 단역쯤 됩니다. 그럼에도 이 둘이 주님과의 만남은 극적이고 아름다웠습니다. 올해 우리의 성탄절이 이 두 사람과 같기를 빕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무서운 집념으로 주님의 성탄을 기다렸습니다. 시므온을 보십시오. 25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것은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고대했다는 뜻입니다. 26절 상반절을 보면,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합니다. 무서운 집념입니다. 실향민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집나간 자식 기다리는 부모를 연상해 보십시오. 주님 뵙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므온이 성탄하신 주님을 품에 안습니다. 그러자 시므온이 이제는 여한이 없으니 데려가 달라고 합니다. 


안나도 마찬가집니다. 안나처럼 불행한 사람도 없습니다. 36절 이하를 보면, 결혼한지 7년만에 과부가 되어 당시 나이가 84세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외롭게 살았겠습니까? 이분도 오직 메시아만을 대망하며 살았습니다. 안나도 시므온과 같습니다. 죽음을 참으며 기다리는 성탄입니다. 주님은 이런 기대와 바람을 묵살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준비하며 대망하면 반드시 찾아오시고 행복하게 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하시지만, 절대 아무에게나 오시는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준비된 자, 기다리는 자, 겸허히 자신을 비우는 자에게 오십니다. 실수로 주님을 만날 사람은 없습니다. 반드시 시므온과 안나처럼 기다리는 자에게 오십니다. 여러분도 시므온이 되시고, 안나가 되십시오. 그래서 기다리고 준비하고 대망하는 자를 찾아오는 주님을 품에 안고 이들처럼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다음으로 이 두 사람은 철저히 성전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27절 이하입니다.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시므온이 성전에서 성탄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늘 금식하고 기도하며 섬기던 성전에서 성탄하신 주님을 뵙고 품에 안았습니다. 37절도 보십시오.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안나도 바로 성전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도 교회를 우리 삶의 구심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전에 대한 집착, 이슬람교도들의 메카에 대한 열정은 맹목적인 게 아닙니다. 성전과 경건, 성전과 신앙은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요즘은 어떻게든 성전과 안전거리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나와 교회와의 거리는 그대로 나와 주님과의 거리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교회의 머리라 고백합니다. 우리가 교회와 안전거리를 두면 주님과 안전거리를 두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절 수 없이 내 믿음만큼 교회생활 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믿음지수를 알고 싶으시면, 교회와 거리를 측정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밤낮 세상을 중심으로 삽니다. 우리는 밤낮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내 삶의 구심점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로부터 자꾸만 달아나려 하지 마십시오. 불행한 영혼입니다. 유럽 여행을 해보십시오. 어느 도시나 마을이나 그 가운데는 항상 교회가 있습니다. 어디나 그렇습니다. 항상 교회가 있고 그 맞은편에 시청이 있습니다. 다 옛 문화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그들이 열심히 신앙생활 할 때는 그들 삶이 철저히 교회 중심이었고, 그들 문화가 교회 중심이었습니다. 부디 교회를 더욱 가까이 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의 삶이 복 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날마다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바로 그 교회에서 성탄하신 주님을 뵙고 품에 안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늘 성령의 감동 속에 살았습니다. 이때는 사실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입니다. 본격적인 성령의 시대가 개막되기 전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늘 성령충만했습니다. 25절 하반절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 상반절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매순간이 성령의 감동입니다. 그러다가 성탄하신 주님을 가장 큰 기쁨으로 만났습니다. 시력 좋다고 보는 게 아닙니다. 빛이 없으면 못 봅니다. 눈이 아무리 좋아도 빛의 조명이 없으면 못 봅니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다 눈 뜬 장님입니다. 마찬가집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조명이 필수입니다. 우리에게는 소위 영안이라는 게 있습니다. 영적 눈입니다. 영적 눈은 물리적 빛의 조명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을 바로 보고, 사건을 바로 보며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결단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영적 분별을 가질 수 없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시골 부부가 안고 온 아기가 메시아임을 이 두 사람만 알아봤습니다. 성령의 계시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깨달음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성령과 무관하게 살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적 눈과 귀가 있습니다. 성령충만이 필수입니다. 부디 성령충만하십시오. 부단히 성령과 교감하십시오. 성령의 계시 속에서 사십시오. 그래야 올해도 시므온과 안나의 감격을 우리도 새롭게 체험합니다. 이것이 성탄절입니다. 2000년 전의 사건을 회고하는 게 성탄절이 아니라, 올해도 새로운 감격과 기쁨으로 성탄하신 주님을 체험하는 사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탄절은 의미가 없습니다. 


2012년의 성탄절이 일찍이 시므온과 안나가 체험했던 감격적인 성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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