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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9m 소통을 위하여(요 1:11-14)

20121209m

요 1:11-14

소통을 위하여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대강절 둘째주일이자 성서주일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성탄은 어떤 사건입니까? 요한복음에 의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성육신(聖肉身), 도성인신이라고도 합니다. 영어로는 Incarnation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요즘이야 이 말이 감흥이 없지만, 요한복음을 처음 접했을 헬라문화권의 사람들은 달랐을 겁니다. 굉장한 충격이었을 겁니다. 요한복음은 헬라문화권 사람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말은 헬라말로 로고스입니다. 철학에서 로고스는 우주의 제1원인자입니다. 다른 말로는 이데아입니다. 희랍 사람들에게는 로고스가 곧 신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헬라 사람들의 신념이자 철학입니다. 여기까지는 놀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로고스가 육신이 되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절대 용납이 안 됩니다.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여기서 육신은 헬라말로 싸르크스입니다. 로고스와 싸르크스는 극단한 대비 개념입니다. 반대말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로고스는 진리, 빛, 하나님이지만, 싸르크스는 거짓이고 어둠이고 악마적인 겁니다. 우리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 바로 육신입니다. 그러니까 1절에서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고, 로고스가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견이 없지만, 14절에서 로고스가 싸르크스가 되었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신성모독입니다. 


초대교회의 최대 이단 가운데 하나가 영지주의(Gnoticism)입니다. 영지주의는 헬라 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기독교도가 되었어도 헬라 철학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헬라 철학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로고스가 싸르크스가 되었다는 거서 대신에 가현설(Docetism)을 주장했습니다. 즉 마치 로고스가 육신이 된 것처럼 우리 눈에 보였을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악마적이며 어둠인 인간이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가현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우리 눈에만 육체처럼 보였을 뿐 본질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간성을 부정했습니다. 이것이 영지주의입니다. 결국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합니다. 이게 성탄이라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때는 이미 영지주의가 기세를 떨칠 때인데, 요한복음이 그러한 주장에 쐐기를 박은 겁니다. 성탄이란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이 낮고 비천한 인간이 되신 사건입니다. 로고스가 실제 싸르크스가 된 사건입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으로 비하하신 사건, 이 세상에 자신을 내던진 사건이 성탄입니다. 그래서 전무후무한 기적이자 유일무이한 역설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까? 11절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아무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그 모험을 환영하지 않았고,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이 그렇게도 구차한 방법으로 말구유로 오셨습니까? 왜 성탄이 필요했던 겁니까? 왜 성육신이 요구되었던 겁니까? 어떤 목적과 필요에 의해 성육신하셨습니까? 성육신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한 평행선이었을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은 영원히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 누구도 뛰어 넘을 수 없는 양자 간의 극단한 간극 때문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인간은 인간대로여야 했습니다. 이 쌍방 간에 소통이 가능하도록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존재론적 본질은 상상할 수 없이 다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엄격한 제약 속에 살고, 하나님은 이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입니다. 우리는 한낱 피조물일 따름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와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동물과도 우리는 대화할 수 없습니다. 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종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개와 사람이 대화가 안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는 종이 다르다는 것을 넘어 존재론적 차원이 다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못 만납니다. 문제는 소통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단절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그때그때 부르셔서 간접적으로 소통하셨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때로는 모세를, 때로는 사무엘을, 때로는 이사야를 보내셨으나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충분히 메신저를 통해 전달이 안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간접적인 대화보다는 차원을 같게 하셨습니다. 양자가 소통을 하려면 차원을 같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소통하려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비약입니다. 하나님의 상상할 수 없는 자기 비하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 주님의 존재론적 실체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주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주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주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복음은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존재와 삶이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절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와 함께 뒹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명쾌하게 알려주신 것이 성육신입니다. 신약성경은 다 주님이 이 땅에 와서 전하신 복음입니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 말씀 앞에서 결단하는 것은 하나님과 생생한 대화요 소통입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입체적인 육성입니다. 히브리서 1장 1절 이하입니다.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명쾌한 말씀입니다.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 성육신이고, 성탄입니다. 


성탄이 무엇을 뜻하는지, 성탄을 통해 이룩된 성육신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깊이 새깁시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지를 깊이 감사하십시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12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부디 성탄에 올해도 황송해 하고, 감사하며, 새로운 마음과 각오로 주님을 여러분의 중심에 영접하셔서 영접하는 자들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의 복과 은혜가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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