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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211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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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엄중한 주권성</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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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욥 39:13-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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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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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이 땅의 모든 짐승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곧 모든 만물에 대한 그분의 주권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욥에 대한 풍자적 질문은 동물 열 여섯 마리와 새 네 마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질문들은 결국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욥의 미약함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여기서 강조하시는 핵심은 그가 주권자이시고 욥의 인생과 이 세상 모든 자연환경을 다스리시는 절대자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고 보전하고 계신 유일한 조물주시라는 것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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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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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공작의 깃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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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lt;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gt;(13절).</p>
<!-- paragraph:p0009 -->
<p class="p1">여기서 말씀하는 &lt;학의 깃털&gt;이란 곧 공작의 깃털을 말합니다. 공작은 교만의 상징입니다. 멋진 그의 깃털이 공작을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공작의 그 멋진 깃털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 보다도 더 화려합니다. 그럼에도 새들은 공작의 그 현란한 색채를 시기하거나 자기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닙니다. 남의 더 좋은 옷을 시기하고, 남의 명품 가방을 부러워하여 분수에 맞지 않은 구매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여러 다양한 은사에도 불구하고 남이 가진 은사를 더 부러워합니다. 내게 아름다운 공작의 깃털이 없다면 꾀꼬리의 목소리가 있을 것이고,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높이 날 수 있는 독수리의 깃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사와 공평하신 섭리를 믿으십시오. 자연에 대해 그러하시듯 우리 인생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공의로우심을 확신하십시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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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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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타조의 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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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lt;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gt;(14절).</p>
<!-- paragraph:p0013 -->
<p class="p1">타조는 자신의 알을 돌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타조는 보금자리를 만들어 알을 낳고 그것을 품어 새끼를 부화시키지 않고 기이하게도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알을 낳아 그냥 버려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래와 태양의 열기로 부화하면 행운이고 그렇지 못하면 다른 짐승들에 의해 알이 깨져버리는데, 용케 부화해서 새끼가 태어나는 경우도  타조 어미는 새끼를 거의 돌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도 어미가 새끼를 &lt;모질게 대한다&gt;(16절)고 하며, 타조의 그런 형편없는 모성 본능조차도 &lt;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하셨기 때문&gt;(17절)이라고 합니다. 즉 동물들이 제 새끼를 낳고 기르고 보살피는 본능 역시도 다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개미의 지혜뿐 아니라 타조의 미련함과 무심함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깨닫고 배우게 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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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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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말의 갈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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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lt;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gt;(19절).</p>
<!-- paragraph:p0017 -->
<p class="p1">말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힘을 쓰지만 그 힘은 결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모든 힘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말에게 힘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결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시 147:10), 도리어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다(시 33:17)고 하십니다. 따라서 말의 힘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호 14:3, 시 20:7, 사 31:1,3). 말의 멋진 갈기는 위엄과 용맹의 상징입니다. 용맹스러운 군마가 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도 욥이 살던 시대에도 그런 우수한 준마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이렇게 말씀합니다. &lt;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자기 길로 행하였도다&gt;(렘 8:6). 죄인의 마음이 악을 단단히 작정하고 주체할 수 없는 욕망과 격정에 사로잡혀 마치 말처럼 악한 길로 질주할 때에는 누구도 그 앞을 가로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성난 군마처럼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못합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그런 난폭한 죄인의 말로가 과연 어떠할지를.</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