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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20121125m</p>
<!-- paragraph:p0002 -->
<p class="p1">창 21:11-21, 롬 9:7-16</p>
<!-- paragraph:p0003 -->
<p class="p1">이스라엘과 하마스</p>
<!-- paragraph:p0004 -->
<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p>
<!-- paragraph:p0006 -->
<p class="p1">[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p>
<!-- paragraph:p0007 -->
<p class="p2"><br></p>
<!-- paragraph:p0008 -->
<p class="p1">최근에 벌어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간의 가자지구 전투가 극적으로 지난 목요일에 휴전이 되었습니다. 이집트가 중재에 나서고 미국이 협상을 지원하면서 휴전 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다행한 일입니다. 이번에도 팔레스타인 쪽의 피해가 컸습니다. 이스라엘은 6명이 사망했고, 팔레스타인 쪽은 162명이 사망했습니다. 지난 2008년 12월에 있었던 가자지구 교전에서 팔레스타인 1400명이 사망했고, 4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이번이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이번에도 주로 여성들과 아이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비극입니다. </p>
<!-- paragraph:p0009 -->
<p class="p2"><br></p>
<!-- paragraph:p0010 -->
<p class="p1">가자지구는 잘 아시는대로 이스라엘의 남단의 한 지역입니다. 이집트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지중해도 끼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자치구입니다. 팔레스타인이 독자적으로 수반도 갖고 경찰력도 갖추어 질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p>
<!-- paragraph:p0011 -->
<p class="p2"><br></p>
<!-- paragraph:p0012 -->
<p class="p1">그러면 하마스는 무엇입니까? 팔레스타인 안에 있는 반이스라엘 무장단체입니다. 그러면서 최대 정당이기도 합니다. 팔레스타인 총 의석수가 132석인데, 하마스가 74석을 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당입니다. 우리가 팔레스타인과 하마스를 구분 없이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상 팔레스타인을 정치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정파가 하마스입니다. 하마스는 원래 이슬람 원리주의자여서 호전적이고 극단적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에 대해 끊임없이 무력도발을 해왔습니다. 이번에도 그 사람들이 로켓포를 쏜 겁니다. 이들의 주된 공격방법은 자살테러입니다. 이번에도 휴전에 들어가기는 했습니다만, 주님이 오셔야 이 전쟁도 끝납니다. 문자 그대로 잠시 전쟁을 쉬고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왜 저렇게 목숨 걸고 싸웁니까? 이스라엘은 무엇이며, 팔레스타인은 정체가 무엇입니까?</p>
<!-- paragraph:p0013 -->
<p class="p2"><br></p>
<!-- paragraph:p0014 -->
<p class="p1">이스라엘은 주후 70년까지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이를테면 원주민입니다. 로마에 망한 70년 이후 이스라엘은 디아스포라가 된 겁니다. 팔레스타인은 유대인들이 쫓겨난 팔레스틴에 들어가서 1948년,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재건되기까지 그 땅에서 2000년간 살았던 아랍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팔레스틴을 2000년간 실효지배했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입니다. 그런데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니까, 그 사람들이 갈 데가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국제사회가 인정해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west bank)에서 자치지구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서방은 이스라엘을 편 들어 그들의 독립을 도왔고, 팔레스타인은 국지전, 게릴라전, 자살테러 등을 통해 자기들 나름의 해방운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라고 하고, 팔레스타인은 2000년간 우리가 실효지배를 해왔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싸움은 끝나지 않을 싸움입니다. </p>
<!-- paragraph:p0015 -->
<p class="p2"><br></p>
<!-- paragraph:p0016 -->
<p class="p1">사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과 대결은 이런 역사적 문제보다 더 뿌리가 깊습니다. 2000년 전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브라함 시대까지 올라갑니다. 창세기에 보면 이삭이 나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장남입니까? 차남입니까? 독자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스마엘은 누구입니까? 역시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첩의 아들입니다. 이삭보다 먼저 태어난 아브라함의 씨가 이스마엘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를 자기 아들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마엘과 하갈을 집에서 쫓아내라고 하니까 아브라함은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근심하고 고민했다고 합니다. 이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지금의 이스라엘과 아랍 사람의 원조입니다. 아랍 사람들이 이슬람이라고 하는데, 이스마엘에서 온 말입니다. 이슬람교라는 말은 이슬람이 섬기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삭의 아들인 야곱의 새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개인의 이름인데, 지금 국호가 되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삭의 아들인 야곱의 후손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미 양측의 정체성이 다 드러납니다. 이삭과 이스마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 둘은 배 다른 형제입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이스라엘이 흩어지니까 아랍 사람의 일부가 거기에 들어가 살았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 팔레스타인이 된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고,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랍 사람입니다.</p>
<!-- paragraph:p0017 -->
<p class="p2"><br></p>
<!-- paragraph:p0018 -->
<p class="p1">그런데 우리의 의문은, 아브라함은 이 둘을 다 자기의 아들이라 생각했는데, 왜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통해 당신의 기업을 잇게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스마엘은 첩의 아들이고, 이삭은 정실의 아들이어서 그렇습니까? 왜 하나님은 이삭만 챙기시고 이스마엘은 버리셨습니까? 이스마엘의 첩의 아들이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첩의 아들이었다고 하면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어떤 경우입니까? 이 둘은 쌍둥이 아닙니까? 왜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는 버리셨습니까? 정실이냐 첩의 아들이냐는 기준은 틀린 것입니다. 오늘 또 하나의 본문인 로마서 9장 8절입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정실의 아들이냐 첩의 아들이냐가 아니라 육신의 자녀냐 약속의 자녀냐가 그 운명을 결정합니다. 육신의 자녀란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자식이고, 약속의 자녀란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도 같고, 어머니도 같고, 생일도 같은 쌍둥이인데,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신 것은, 야곱은 이쁜 짓만 하고, 에서는 늘 못된 짓만 해서가 아닙니다. 로마서 9장 11절 이하를 보십시오.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무슨 뜻입니까? 에서와 야곱, 이 두 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그래서 그들이 주체적으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셔서 택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한 배에서 난 형제고, 한 씨에서 난 쌍둥이라 해서 그 운명이 같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약속의 아들이냐, 그렇지 못한 육신의 아들이냐가 이스마엘과 이삭을 가르고, 에서와 야곱을 가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와 미워하시는 자를 결정 짓습니다. </p>
<!-- paragraph:p0019 -->
<p class="p2"><br></p>
<!-- paragraph:p0020 -->
<p class="p1">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거꾸로 해석합니다. 비록 동생이지만 무서운 집념으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필사적으로 형을 찍어 넘겼기 때문에 결국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 하나님의 기업을 쟁취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그 야곱의 집요함에 백기를 드셨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 수준은 초급반입니다. 그러면 중급반의 이해는 무엇입니까? 절대 야곱이 그토록 지독하게 굴었기 때문에 선택받은 게 아니고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기에 운명적으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차남이냐 장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운명을 지으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말씀이 바로 이 뜻입니다. 우리가 믿어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초급반의 해석입니다. 우리가 믿어서 선택받은 게 아니라 이미 창세 전에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기에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거워서 신앙생활 합니까? 죽지 못해서 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너무 힘들어 하면서도 지금 이 예배 자리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체념하고 순순히 신앙생활하면 쉬워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 남보다 양심적으로 살고, 뭔가 우리에게서 싹수가 보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택하신 게 아닙니다. 이미 태어나기 전에,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우리 키를 재보기도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셨다는 사실,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p>
<!-- paragraph:p0021 -->
<p class="p2"><br></p>
<!-- paragraph:p0022 -->
<p class="p1">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에게 내리는 최후의 복을 훔쳤습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말은 이겁니다. 우리가 흔히 알 듯이 야곱이 연로하신 부친을 속인 사건이냐? 부친 이삭이 아들 야곱을 속인 사건이냐는 겁니다. 저는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해서 나이 많아 눈 먼 아버지를 속였다고 보지 않습니다.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완벽하게 속인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형인 에서에게 줄 축복을 야곱에게 해 준 것입니다. 이 사건을 이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을 때가 60세이고, 야곱이 아버지를 속일 때가 20세쯤 되니 이삭의 나이 80세고, 이후 이삭은 100년을 더 살고 180세에 죽었습니다. 180세까지 산 이삭이 80세쯤에 아무리 눈이 어두웠다고 해도 야곱의 그 어설픈 연기에 속았겠습니까? 야곱이 염소를 잡아 그 가죽을 팔에 감고 목에 감았습니다. 에서가 몸에 털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야곱이 형 에서를 가장해 털로 위장한 겁니다. 그때 이삭이 야곱에게 뭐라고 합니까? 음성은 야곱인데, 팔은 에서로다고 했습니다. 뻔히 다 안 겁니다. 야곱은 연기한답시고 했지만, 아버지는 다 알았습니다. 어떻게 염소털과 사람털을 구분 못하겠습니까? 저 같이 둔한 사람도 세례식 때 머리에 손을 올려보면, 가발인지 아닌지 다 압니다. 이삭이 완벽하게 속아준 겁니다. 그리고 마음껏 축복해 준 겁니다. 지금도 야곱은 자기가 아버지를 속였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이미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아들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개인적으로는 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이삭은 다 알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승복한 겁니다. 적자냐 서자냐가 아니라, 약속의 아들이냐 육신의 아들이냐가 모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p>
<!-- paragraph:p0023 -->
<p class="p2"><br></p>
<!-- paragraph:p0024 -->
<p class="p1">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태어나기 전에 모든 것을 결정하십니다. 이것은 누구도 풀 수 없는, 헤아리기 어려운 불가사의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저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 한국 사람을 택하셨을까? 일본 사람들이 더 신사인데, 일본 사람들이 더 잘 사는데, 왜 그들은 미신에 절어 살까? 우리보다 더 성실하고 교양도 더 많은데, 왜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버려두시고 왜 굳이 우리를 고집하시고 간섭하실까? 이것은 누구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마음입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 14절 이하가 이 문제에 대한 답입니다.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선택의 문제는 하나님 고유의 주권행위라는 것입니다. 몇 구절 아래 20-21절도 보십시오.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엿장수가 1분에 가위를 몇 번 치든 이것은 오직 엿장수 마음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무슨 그릇을 만들든 그것은 토기장이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왜 뚝배기이고, 나는 왜 구워내자마자 깨느냐고 할 수 없습니다. 토기장이 마음입니다. 야곱을 택하시고, 이삭을 택하시고, 못난 우리나라 사람을 선택하신 것은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신성불가침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항의나 회의가 아니라 오직 감사할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잘난 사람을 버려두고 못난 나를 택하신 데는 조건이 없습니다. 당신 임의대로 이스마엘은 버리고 이삭은 택하시며,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는 불쌍히 여길 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선택의 권한을 제대로 이해하십시다. 그래서 역사의 현실적인 사건과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좀 더 성서적으로 풀고 해답을 얻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기원합니다. </p>
<!-- paragraph:p0025 -->
<p class="p1"><br></p>
<!-- paragraph:p0026 -->
<p class="p1"><br></p>
<!-- paragraph:p0027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www.youtube.com/embed/SFv491qoGb4" title="미디어 원본"></a></sp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