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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2m: 실패담(마 26:69-75) 사순절 넷째주일

2009년 3월 22일 주일낮예배/사순절 넷째주일
본문: 마 26:69-75
제목: 실패담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성공담이 아니고 실패담이어서 죄송합니다. 수제자를 자처했던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사건입니다. 천추의 한이 될 뼈아픈 얘기인데, 어쩌다가 베드로가 참패했을까요?

우선 경솔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잡히시던 날 저녁입니다. 주님이 성만찬을 제정하고 계시고, 세족식을 거행하십니다. 그다음에 주님은 그 다락방에서 나오셔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거기서 마태복음 26장 31절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심각한 말씀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려도 나는 안 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다시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부인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장담합니다. 35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고 했습니다. 같은 장면인 누가복음 22장 33절을 보면,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절대 방심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너무도 쉽게 장담을 합니다. 경솔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도 쉽게 주님을 배신한 겁니다. 신앙생활은 두렵고 떨림으로 해야지 큰소리치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졸다가 실패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0-41절입니다.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8절을 보면 주님이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라고 하시는데, 베드로는 자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토록 고민스러울 때 베드로는 잡니다.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주님의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주님이 세 번이나 와서 깨웠는데, 여전히 제자들은 자고 있습니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베드로는 실패한 겁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말은 기도 안 하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드는 대부분의 원인은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졸거나 자면 가차없이 시험에 듭니다.

그러면 왜 깨어 있지 못합니까? 주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겁니다. 요즘 사순절 기간인데, 평소에는 제대로 못 하더라도 이 기간만큼은 새벽기도에 참석하고 싶어도 안 됩니다. 마음은 원하는데 육신이 안 따라줍니다. 정말 깨어 있기를 바란다면, 자신의 육신을 컨트롤 해야 합니다. 건전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할 수 있고,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는 한 베드로도 별 수 없습니다. 무방비로 마귀에게 당합니다. 깨어 있지 않고 자는 사람은 마귀의 밥이라고 생각하시면 맞습니다. 베드로가 왜 참패했습니까? 잘 잤기 때문입니다. 분명 주님이 깨어 기도하라고 했는데, 막무가내로 잔 겁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뼈아픈 시험에 든 겁니다.

베드로는 멀찍이서 주님을 좇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바짝 좇아가야 합니다. 자동차가 여러 대가 갈 때 앞차를 바짝 좇아가야 합니다. 멀찍이 따르다 보면 앞차를 놓칩니다. 주님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은 앞서가는 목자를 부지런히 따라가야지 한눈팔거나 뒤처지면 결국 낙오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왜 많은 이들이 멀찍이서 주님을 좇을까요? 왜 주님과 거리를 두는 겁니까? 여차하면 달아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안전거리를 둬야 위험하다 싶으면, 손해다 싶으면 달아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 다가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설정해 놓은 안전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차하면 도망가려고 멀찍이서 따르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거리는 가까울수록 좋습니다. 주님과의 거리는 안전거리는 필요 없습니다. 베드로를 거울로 삼으십시다. 지금 주님과의 거리를 점검하십시오. 베드로처럼 멀찍이서 따라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운전할 때는 안전거리를 꼭 확보하십시오. 주님 따를 때는 바짝 좇아가십시오.

베드로가 실패한 원인 중 하나는 하인들과 함께 앉았기 때문입니다. 강도를 잡듯이 주님을 체포해서 온갖 모욕을 주고 있는 무리들과 함께 숯불을 쬐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한 통속이 된 겁니다. 믿는 자들은 앉을 자리를 잘 찾아야 합니다. 시편 1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런데 베드로는 오만한 자들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성도(聖徒)는 구별된 백성으로서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세상과는 구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문화에 함부로 동화하는 게 미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인만의 문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현주소를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주님 곁에 있는지, 세상 사람들 곁에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 하인들 틈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고 부인했습니다.

그렇게 참혹한 실패를 맛본 베드로가 과연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베드로의 위대한 점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베드로는 우리들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베드로의 뛰어난 장점은 영적 순발력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단순 다혈질이어서 우리 못지않게 실수를 잘 저지릅니다. 그런데 그는 오뚜기처럼 다시 섭니다. 영적 순발력을 발휘해서 항상 그 실패를 극복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우뚝 섭니다. 그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본문 75절입니다.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닭소리를 들으며 주님의 말씀을 생각한 겁니다. 우리는 목사의 설교를 듣고도 못 깨닫는데, 베드로는 닭소리를 듣고도 깨닫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또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회개했다는 겁니다. 가슴을 치며 자복했습니다. 사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나 주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가룟유다나 주님을 배반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와 가룟유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했으나, 가룟유다는 자살했습니다. 똑같이 실패했는데 한 사람은 회개하고, 한 사람은 자살했습니다. 이게 두 사람의 갈림길입니다. 부디 베드로의 이런 영적 순발력을 배웁시다. 비록 실패할지라도 말씀을 생각하며 지체하지 않고 통회함으로 용서함을 얻어 본래의 자리, 지위를 회복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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