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저는 기적을 믿습니다

한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고마운 사람들이 늘 성전 어귀까지 업어다 주어 구걸을 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습니다. 그의 비극은 무엇보다도 홀로 걸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움직이려면 언제나 남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어떤 바람이 있다면 그저 굶지 않고 그날그날의 구복을 채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눈에는 이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직 손바닥에 놓은 몇 푼 동전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라고 한들 왜 한 때는 자기 운명에 저항하는 몸부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언제부턴가는 자신의 그 불가항력적인 숙명에 지쳐 체념을 거듭하는 동안 이제는 어느새 숙명론자가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하지 않을뿐더러 희망에 대한 부질없는 충동 따윈 우선 제 스스로가 용납하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두 가지 이성적인 신념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적은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절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은 앉은뱅이가 감히 걸으려는 희망을 갖는 것은 황당한 망상이 됩니다. 아니, 죄악이 됩니다. 기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드러누워 죽기를 각오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절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현재>가 상처를 입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는 그저 남의 손에 이끌려 성전 밖에 앉아 구걸이나 하며 사는 게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것입니다.

왜 기적이 없다는 겁니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소위 인과율만이 현실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의 잘못된 신념입니다. 앉은뱅이를 날마다 성전 입구까지 업어다 준 사람들이나 성전을 드나들며 푼돈을 떨어뜨려 적선을 한 사람들이 실은 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전을 드나든다고 하면서도 앉은뱅이가 일어나 제 발로 걷거나 뛰며 자기들과 나란히 성전에 들어가는 기적 따위는 믿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그런 일이 일어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 동시에 절망에 빠뜨리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적선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구원이 무엇이고, 신앙의 기적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성전에 들어가려다 적선하는 그 앉은뱅이를 보고 몇 닢 동전을 던져주는 대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며 잡아 일으켰는데, 그가 정말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적을 믿습니다. 기적이 없으면 어떡하라는 겁니까? 억울한 사람은 영원히 울고, 포로 된 사람은 영원히 압제 아래 있어야 하고, 눈먼 사람은 영원히 어둠 속에, 앉은뱅이는 영원히 운명의 족쇄에 매여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주님은 능히 우리의 모진 운명을 바꾸어 놓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은혜로운 사순절에 우리 모두 자신의 비극에 종지부를 찍고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참된 기적을 체험하게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