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15m: 발을 씻으라!(요 13:3-11) 사순절 셋째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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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5일 주일낮예배/사순절 셋째주일
본문: 요 13:3-11
제목: 발을 씻으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안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다 죄인이라고 하면 기분 나빠 합니다. 심지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며 대들기도 합니다. 전도하다가 가끔 이런 봉변을 당합니다. 믿는 사람들도 죄 얘기하면 싫어합니다. 죄를 주제로 설교하면 거북해합니다. 우리도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죄인입니다. 다윗은 내가 죄 중에 잉태되고 죄악 중에 태어났다고 했는데, 이것은 어김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이것을 유전죄, 곧 원죄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담의 후예인 한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원죄입니다. 우리는 다 모태 신자라는 말처럼 모태 죄인입니다. 뿐만 아니라 태어난 후에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으로 날마다 죄를 짓는데, 이것을 자범죄라고 합니다. 자범죄도 사실 거의 숙명적입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몰라서 죄를 짓느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알고도 죄를 짓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짐짓죄라고 합니다. 죄가 좋아서 고의적으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짓는 죄를 고범죄라고 합니다. 이래도 우리가 죄인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양한 죄를 날마다 밥 먹듯 짓고 삽니다.
이렇게 죄에 쩔어 사는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냐구요? 베드로전서 1장 19절은 구속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히브리 말로는 <짜다크>, 헬라말로는 <디카이오> 라고 하는 구속, 속량입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거듭난 우리들이 그러면 죄를 안 짓습니까? 여전히 죄를 잘 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과연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람 맞냐며 회의합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회심한 이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소리 질렀습니다.
왜 거듭난 사람이 다시 죄를 짓습니까? 아무리 거듭났다 해도 당장에 성인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갑자기 걷는 게 아니고 수없이 넘어지며 걸음마 연습을 하듯이 우리도 그렇습니다. 다만 우리가 똑같은 죄를 지어도 중생한 이후에는 그 죄의 성격이 다릅니다. 전에는 마귀의 종으로 살면서 죄를 지었으나, 이제는 옛날 버릇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그러니까 죄의 성격이 다릅니다. 로마서 6장 11절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죄의 통치를 받던 옛 사람이 죽었다는 뜻이지, 죄에 대한 그리움이나 욕구가 해소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의 감각은 살아있습니다. 중생한 이후 우리는 마귀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식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몸에는 죄의 니코틴이 남아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죄에 대한 그리움이 나를 못 견디게 합니다. 평생 우리는 죄를 지으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에는 죄의 탄력이 관성이 남아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무 자르듯 우리는 죄를 멀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죄가 좋은 겁니다. 그래서 늘 죄의 유혹에 시달립니다. 실제 죄를 끊었다고 하면서도 기회가 되면 죄를 짓습니다. 마귀가 나를 죄 짓도록 강제하지는 못하지만, 내 스스로가 죄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해 짬짬이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를 지어도 못난 신자일 뿐이지 다시 죄인이 되거나 마귀의 종으로 환언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자녀라는 신분 자체가 취소되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불효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면서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 놓고, 안심하고 타락해도 됩니까? 로마서 6장 2절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죄를 짓는다고 천국에 못 가는 것은 아니지만, 훗날 천국에 가서 문제가 됩니다. 천국에 가서 누릴 영화는 이 땅에서 성화의 정도가 결정합니다. 그래서 성화지수와 영화지수는 정비례합니다.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수록 훗날 천국에서 누릴 영화가 큽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며 세속적으로 살면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 가는 성화가 지연되거나 이루어지지 않기에 천국에 가서 누릴 영광이 보잘 것 없습니다. 어떻게 살든 천국은 갑니다. 이것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누릴 영화는 이 땅에서 축적하는 성화에 정비례합니다. 이것은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의 영광이라고 해서 다 동급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대궐에서 사는데, 나는 골방 같은 데서 살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목표가 성화라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어떻게든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성화가 최대 과제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안 지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성화에 애쓴다고 해도 죄를 안 지으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님이 주신 겁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윽고 베드로 앞에 주님이 오자, 베드로가 펄쩍 뛰었습니다. 베드로 말이 맞습니다. 당시에는 노예나 종이 손님의 발을 씻는데, 선생이 어떻게 제자의 발을 씻습니까? 그러자 주님이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 어떻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지 않는다면 대체 우리와 주님이 어떤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자 베드로가 깜짝 놀라 손발뿐만 아니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들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목욕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로 죄에 쩔은 우리 온몸을 씻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목욕한 사람도 저녁에는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욕한 사람도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보혈로 온몸을 씻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상살이하면서 죄를 짓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도 꼭 손발을 씻는 일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본문에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목욕한 자라도 손발을 씻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만 전신을 씻을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구약시대 성막이나 성전 구조를 보면, 성전 뜰 중앙에 번제단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짐승을 잡습니다. 이것은 속죄제입니다. 내 대신 짐승이 죽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는 성소와 지성소로 들어가야 하는데, 거기로 가려면 반드시 번제단을 거쳐야 합니다. 피뿌리는 의식을 거쳐야 합니다. 번제단을 지나면 물두멍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반드시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방금 피로 전신을 씻었는데, 왜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발을 씻습니까?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다 보면 금방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소 앞에 놓인 대야에 신경을 안 쓰지만, 실은 중요한 기구입니다. 번제단에서 전신이 성결케 된 자라 해도, 성전에 들어가려면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그러면 발을 씻는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어떻게 그때그때 죄를 처치해야 합니까? 먼저 자기의 허물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꾸만 변명합니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대한지 모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죄를 범했다고 하고, 하와는 뱀이 자기를 유혹해서 범죄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이를 키우면서 속상할 때는 아이가 죽어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때입니다. ‘잘못했다’고 하면 당장에 끝날 일을 원죄를 쓰고 태어난 아이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집을 피우거나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허물을 인정하는 게 발 씻는 첫 번째 태도입니다.
다음은 그 죄를 시인하고 온전히 고백하는 겁니다. 사랑도 속으로만 하지 말고 표현하라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 죄를 마음으로만 시인할 게 아니라 주님 앞에 구체적으로 실토해야 합니다. 내 안에 품고있는 죄를 끄집어 내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종양을 떼어내는 작업입니다. 죄를 오래 품고 있으면 여러 가지로 해롭습니다. 가톨릭은 여러 가지 성례, 성사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고해성사입니다. 어떤 죄든 신부를 찾아가 고백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대신해 사제가 속죄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주님께 직접 고해하라고 합니다. 이게 발을 씻는 두 번째 중요 행위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용서받은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면 반드시 용서하십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단순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이 말씀에 근거해서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회개해도 내 죄를 용서했다는 주님의 생생한 음성을 못 듣습니다. 우리 영성이 탁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은 사제가 물리적으로 사죄의 선언을 해주는데, 우리는 주님께 직접 나가서 주님으로부터 그 선언을 들어야 하는데, 우리 영이 맑지 못해 그렇습니다. 실컷 고백해 놓고도 긴가민가합니다. 정말 용서하셨을까? 싶습니다. 말씀에 근거해서 확신하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안녕이 보장됩니다. 잘못했으면 벌 받든지 용서받아야 마음이 편합니다. 그렇지 않고 죄를 처리하지 않고 내 속에 넣어두고 있으면 죄의식에 사로잡혀 비겁하고 초조해져서 심신에 해롭습니다.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죄를 우리 안에 넣어 두면 안 됩니다. 모든 죄의 짐을 주님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십시오. 우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부디 목욕한 사람도 반드시 그때그때 더러워진 발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회개를 통해 참 자유와 은총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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