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01m: 不惑은 없다!(마 4:1-11)/사순절 첫째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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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일 주일낮예배/사순절 첫째주일
본문: 마 4:1-11
제목: 불혹(不惑)은 없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공자님은 40을 불혹(不惑)이라 했습니다. 사람 나이 40이 되면 더 이상 유혹을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니 40이 되면 유혹을 받지 않아야 진정한 군자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전 40일간 마귀에게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유혹을 받았습니다. 유혹을 받았다는 것은 마음이 흔들렸다는 뜻인데, 주님 같은 분이 마귀의 유혹으로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까? 당시 주님은 30세였기에 수양이 부족해서 그랬습니까? 성경에는 불혹이 없습니다. 오히려 인생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유혹에 시달립니다. 주님은 생애 마지막에도 유혹을 받아 괴로워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7절 이하입니다.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주님은 최후의 순간에도 십자가의 쓴 잔을 피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괴로워하셨습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한 번도 시험에 넘어가신 적은 없습니다. 그 시험으로 실족하신 적은 없습니다. 주님은 시험을 다 이기셨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아닙니다. 주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간 기도 후 유혹을 받은 것처럼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40년간 숱한 유혹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실패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유혹은 주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는 가장 흔한 유혹입니다. 주님은 실패하지 않고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훌륭한 모범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일상적인 시험이 이런 것이라고 주님이 미리 보여주신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이 시험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먼저 주님은 빵의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물질적인 시험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주님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육체를 지닌 분입니다. 주님도 우리처럼 안 먹으면 배고프고, 안 마시면 목 마릅니다. 그런 분이 광야에서 사십 주야를 금식하셨습니다. 저는 최고 5일까지 금식해 봤는데, 둘째 날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코에서 온갖 음식 냄새가 다 나고, 빵이 그렇게 먹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 보십시오. 그 틈을 타서 주님을 유혹하는데 너무도 악랄하고 잔인합니다. 안 그래도 광야에 널린 모든 돌멩이가 다 떡덩이로 보이는데, 사탄이 나타나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더구나 사탄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자신이 가장 잘 알면서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합니다. 이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야 할 지경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단호히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며 물리치셨습니다. 이참에 돌을 떡으로 만들어 굶주림도 채우고, 하나님의 아들임도 증명하면 일거양득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시험의 본질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산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탄은 떡으로만 살 수 있음을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게 아니고 떡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필요하다’고 하신 겁니다. 떡이 전부요, 물신 숭배, 물질지상주의를 일언지하에 배격하신 겁니다.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당한 최초 시험이 물질 문제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은 애굽의 고깃가마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온 백성이 아론과 모세를 성토하며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하셨습니까? 지금도 마귀는 떡이 전부라며 우리를 뀁니다. 돈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게 만듭니다. 황금 송아지를 경배하게 만듭니다. 지금도 우리는 가장 많은 정력을 물질에 바치고 있습니다. 이게 다 마귀의 부추김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잘못된 가치관을 주입했습니다. 돈이 시대의 최고의 신입니다. 이것을 부인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돈을 사랑하면 돈으로 망합니다. 돌로 떡을 만들면 그 만든 떡으로 망합니다. 우리나라는 돌로 떡을 만들려다 망했습니다. 성실하게 일을 해야지 돌로 떡을 만들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이것은 불법입니다. 이게 다 떡이 절대라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런 겁니다. 40일은커녕 사흘만 굶어도, 아니 제 먹을 것을 잔뜩 쌓아 두고도 돌로 떡을 만들지 못해 안달입니다. 짐승들에게는 떡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은 떡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육은 떡으로 되지만, 영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떡만 이라는 마귀의 유혹을 칼처럼 물리치셨습니다. ‘떡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을 우리는 뼈에 새겨야 합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떡의 유혹에 약할 수 있는 때입니다. 자신을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영혼을 판다’는 광고를 본 적이 있는데, 섬뜩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5절 이하입니다.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이것은 물질적인 시험 이상의 정신적인 시험입니다. 이 유혹도 정말 교활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의 사자가 너를 안전하게 받아 줄 것 아니냐’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너를 받아 주면 네가 당장에 스타가 될 것 아니냐는 겁니다. 주님이 이때는 대중적인 사역을 감당해야 할 시점이었습니다. 그러니 인기가 필요하지 않았겠습니까? 대중적인 인기를 한몸에 얻고 사역하라는 겁니다. 한 방에 하나님의 사랑도 확인하고, 대중적인 인기도 얻을 수 있으니 주저말고 뛰어내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시며 물리치셨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험하는 불경한 일입니다. 뛰어서 죽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살면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미 깨진 사랑입니다. 자꾸만 사랑을 떠보는 겁니다. 이건 이미 불신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이지, 불신하거나 회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 주님이 그때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는데 멀쩡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쩡한 몸과는 달리 깨졌을 겁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살아계심을 만천하에 증명하겠다며 살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렸다고 칩시다. 그 사람 살겠습니까? 죽겠습니까? 신속하게 잘 죽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자를 보내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할 일이 없어 인간의 영웅심이나 명예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자를 보내시지 않습니다. 만약에 자기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 떠밀었다면, 사자를 보내셨을 겁니다. 만일 주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다면 죽었을 겁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님을 떠밀었다면, 사자를 보내서 받아주셨을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장난에 놀아나시지 않습니다. 전에는 그런 사람들 많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쥐약 먹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한다고 하던 사람들, 그 사람들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박카스인 줄 알고 마셨는데, 쥐약이었다면 살려주셨을 겁니다. 주님은 마지막 십자가 상에서도 같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조롱하며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저 같으면 당장 내려와서 뺨따귀를 때리고서라도 다시 올라갔을텐데, 그때도 주님은 가만히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신뢰의 대상이지, 확인이나 불신, 회의의 대상이 아닙니다. 십일조 외에는 하여간 시험하면 안 됩니다. 다른 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면 견딜 수 없는 하나님 모욕입니다.
마지막 시험입니다. 8절이하입니다.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것은 물질이나 정신적인 시험보다도 하나님의 배반하라는 영적 시험입니다.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집니다. 처음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은 광야, 평지에서 이루어졌고, 정신적인 시험은 성전 꼭대기였고, 지금은 지극히 높은 산에서 시험합니다. 그만큼 유혹의 강도가 세졌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부귀와 영화가 내 것이 될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 조건도 아주 간단합니다. 아무도 안 보는 산 꼭대기에서 마귀에게 절 한 번 하면 됩니다. 이렇게 간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추상같이 ‘다만 하나님만 섬기라’고 하십니다. 처음 시험에서는 떡만 이라는 거짓된 절대를 배격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만’이라는 신념, 믿음이 우리를 살린다고 하십니다. 주님께는 ‘하나님만’이라는 것이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였습니다. 우리가 툭하면 왜 마귀에게 절합니까? 바로 ‘하나님만’이라는 참된 절대가 없거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만’이라는 절대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이게 없어서 바람부는대로 흔들리거 물결치는대로 밀립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다 보여주며, ‘내게 절 한 번 해라’고 하면, 게다가 아무도 안 보는 높은 산에서 그렇게 요구한다면, 사양하실 분 있으십니까? 주님처럼 ‘하나님만’ 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게 무너지면 모든 게 다 무너집니다. 여러분, 마귀의 유혹에는 면역, 백신이 없습니다. 한 번 겪고 나도 또 같은 시험이 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나는 약하지만, 이 세 가지 시험을 다 이기신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도 이런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갈수록 악해지는 마귀의 유혹을 주님처럼 ‘하나님만’이라는 신앙으로, 성령충만으로 이깁시다. 그래서 모두가 참된 승자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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