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090301n: 바리새인의 義(마 5:17-22)

2009년 3월 1일 주일오후예배
본문: 마 5:17-22
제목: 바리새인의 의(義)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주님이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장 광야로 가셔서 40주야를 금식하신 뒤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신 후,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딛고 계신데, 주님 공생애의 첫 공식 설교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이후에 나오는 산상수훈이 바로 주님의 공식 설교입니다.

주님은 우선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고 전제하신 후, 20절에서는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못 들어 간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어렵고 심각한 말씀입니다. 왜냐면 바리새인의 의는 보통 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는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정말 바리새인은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율법에 철두철미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유대사회에서 남다른 의인이었다는 뜻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두 율법 전문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또 율법에 근거해 필요한 율례를 만들었고, 율법을 척도로 사람을 구분했습니다. 요즘은 죄인, 의인이 신앙고백적 개념이지만, 당시에는 사회 계급적 개념이었습니다. 양반, 상놈의 뜻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의인과 죄인을 누가 구분하냐면,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한 주에 두 번씩 금식한 겁니다. 하루에 세 번씩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요즘도 중동의 이슬람 교도들은 하루에 네 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합니다. 이 사람들 바리새인은 그런 종교생활에 대단히 철저했습니다. 마당 귀퉁이에 심은 소채에서도 십일조를 떼어 바쳤습니다. 철저히 안식일을 성수했습니다. 그렇게 율법에 철저한 사람들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 과연 누가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의는 바리새인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중 누가 한 주에 두 번씩 금식하며, 하루 세 번 성전에 와 기도합니까? 대체 주님의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바리새인의 의는 율법적 곧 형식적이고 문자적인 의였습니다. 바리새인의 의의 한계가 바로 이것입니다. 기계적이고 피상적인 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보고 ‘외식하는 자’, ‘회칠한 무덤’이라고 고발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문자만 범하지 않으면, 형식만 범하지 않으면 그 속은 어떻든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 본질을 구현해야 하는데, 그들은 정신과는 상관없이 형식에만 연연했습니다. 위선적인 의입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 곧 무덤은 썩은 시체가 있지만, 그 겉만 회칠해 깨끗한 모습을 한 것과 같다며 주님이 성토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살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에 의하면 살인은 실제 칼이나 도구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속은 죽이고 싶도록 증오심으로 들끓지만 사람을 상해하지 않으면 살인이 아닙니다. 이게 율법적인 의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친 복음적인 의는, 형식이나 문자가 아니라 정신이었고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중심이 어떤 것이냐를 문제 삼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실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아도 이웃을 증오하면 이미 살인죄를 범한 것이나 진배없다는 겁니다. 살인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라 미움 혹은 증오와 연장선상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의 의는 반드시 행위로 살인하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이웃을 증오하면 이미 살인죄를 범했다는 겁니다. 형식이나 결과를 보는 게 아니고, 그 동기와 과정, 중심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의입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인 의를 넘어서서, 바리새인들의 의를 넘어서서 본질적인 의를 추구해야 천국갈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27절에 나오는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적으로는 실제 행위로 간음을 범하지 않으면 그 속이야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적 의의 잣대는 아닙니다. 실제 행위는 하지 않으나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겁니다. 행위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 마음에 동기와 과정을 보고 판단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인 의의 잣대입니다. 도적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과 주님이 판단하는 것이 다릅니다. 중심이 문제입니다. 동기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절 이하입니다.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을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이 말씀대로 하면 하루도 못가 우리에게 남아있을 수족이 있겠습니까? 한 시간만 지나면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실제 몸의 지체를 잘라내라는 게 아니고, 동기를 문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음욕을 품는 마음, 이웃의 물건을 탐하는 마음, 이웃을 증오하는 마음, 그 동기를 자르고 파 버리라는 겁니다. 이게 실제 행위로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근원을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주문이요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은 항상 중심을 문제 삼으십니다. 결과가 아닙니다. 문자나 율법, 형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무늬만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천국 가지 못합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의 의입니다. 겉으로는 바리새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속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를 넘어서야 천국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나 보란 듯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앞에서 안식일을 범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들의 율법적 의에 대한 도전이요 비판이었습니다. 형식적 의에 매달려 있지 말라는 겁니다. 정신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형식적 의에 주님이 일침을 가하신 겁니다.

이제 주님이 하신 말씀, ‘바리새인의 의와 서기관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 못 들어간다’는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부디 본질을 추구하십시오. 율법이나 형식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정신을 추구해야 합니다. 율법으로는 안 되고, 복음적인 의를 관철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성화와 구원에 이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이런 바람과 기대에 부응하여 율법적 의가 아니라 복음적 의를 추구하는 복된 성도들 되십시다.

원문 자료와 첨부

  • 미디어: 원래 주소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