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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2m: 성서적 인간학(창 1:26-28, 2:7-9)

2009년 2월 22일 주일낮예배
본문: 창 1:26-28, 2:7-9
제목: 성서적 인간학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지난 12일이 진화론의 선구자인 찰스 다윈의 200주기였습니다. 올해가 그의 역작인 「종의 기원」이란 책이 출간된 지 150주기가 되던 해입니다. 1859년 12월 24일에 출간되었습니다. 영국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그를 조명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리고 있는데, 특히 무신론자들과 안티 기독교의 세력들의 활동이 대단합니다.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이게 진화론과 창조론자들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알고 또 믿고 계십니까? 우리도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배웠습니다. 진화론에서는 특히 다윈은 자신의 책에서 인간의 기원을 7가지 가설로 제시합니다. 처음에는 무생물, 무기물뿐이었는데, 거기서 생명이 우연히 발생했다고 합니다. 무기물이 진화해서 유기물이 되고, 유기물이 진화해서 바이러스가 되고, 박테리아가 되고, 거기서 단세포 생물이 되고, 단세포 생물이 후생동물이 되고, 후생동물이 무척추 동물이 되고, 거기에서 어류가 되고, 물고기에서 양서류, 양서류에서 파충류, 파충류에서 조류, 조류에서 비로소 포유류가 되고, 포유류에서 유인원이 됩니다.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진화된 겁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별 게 아니고 환경에 잘 적응해서 가장 모범적으로 진화해온 적자생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자들은 창조를 거부합니다. 인간은 진화 역사의 선두주자일뿐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선택으로 고등한 존재로 창조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달리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천지만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진화를 거듭해서 종의 다양성이 나타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물의 기원은 진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1절 이하입니다.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처음부터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이 품목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창조하신 품목이 앞으로 진화를 통해 더 진보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정도라면 그것은 완벽한 겁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솜씨에 대해 감탄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했다’는 말씀이 무려 10차례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이미 다윈이 나타날지를 아시고 그랬는지, 계속해서 그 종류대로 그 종류대로 창조했다고 하십니다. 결코 무기물만 창조해 놓았는데 거기서 우연히 진화해서 종의 다양성이 구축되고 마침내 인간이 발생한 게 아닙니다.

오늘은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 창조론이 가르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진화론에서는 사람도 진화의 산물입니다. 그 동안 가장 왕성하게 진화해온 진화의 정점에 선 종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다른 생물과 인간은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존재라는 겁니다.

우선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영적으로 지으셨습니다. 2장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생령이라는 말은 원어로 ‘네페쉬’ 라는 말인데, 이것은 산 사람을 가리킵니다. 살아 움직이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기 전에는 흙덩이에 불과했는데, 하나님이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된 겁니다. 그렇다면 생기란 게 뭡니까? 원어로는 ‘루아흐’입니다. 이 말을 영어에서는 ‘소울’(soul) 이라고 했습니다. 라틴말로는 ‘아니마’(Anima), 독일말로는 ‘젤레’(Seele)라고 합니다. 헬라말로는 ‘프뉴마 혹은 프쉬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적인 것을 불어 넣으셨기에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게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점입니다. 인간만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점에서 다른 피조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육적인 것을 추구하면서도 영적인 것을 그리워합니다. 우리는 육적인 풍요로만 살 수 없습니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전인’(全人)이라고 할 때 영과 육이 함께 조화를 이룰 때 전인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돈 많다고, 인기 많다고 잘 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게 충족 안 되면 공허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만 만든 게 아니고, 그 코에 영을 불어 넣으셨기에 육적인 것도 영적인 것도 함께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게 충족이 안 되니 삶의 의미를 못 느끼는 겁니다. 주님은 떡으로만 살 게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떡을 부인하신 게 아닙니다. 떡만으로는 안 되고, 영적인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에게는 루아흐를 불어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불행은 다들 육적으로 산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책임합니다. 기도하고, 말씀보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존재로 출발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불어 넣으신 생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존재로, 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따라서 육적인 삶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을 살 때 비로소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처음부터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1장 26-27절입니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라틴말로 ‘이마고 데이’(Imago Dei)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습니다. 형상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기에 하나님께는 형상이 없습니다. 형상을 가진 신은 이미 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을 씁니다. 이 형상은 하나님의 외모를 뜻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품성, 품격의 형상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당신 품성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고유한 품성은 무엇입니까? 인격입니다. 신격이라고 해야 맞겠지요. 인격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고유한 품성인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닮게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의 인격은 하나님에 비해 상대적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죄로 인해 망가져서 지성이 형편없이 탁해지고, 감정이 천해지고, 우리의 의지가 항상 악한 쪽으로만 발동하고 있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인격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인격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만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있습니다.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1장 26절 상반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이란 말도 원어로 ‘엘로힘’입니다. 복수입니다. ‘엘’ 또는 ‘엘로아흐’는 단수고 ‘엘로힘’은 복수입니다. 유일신 하나님이 왜 복수입니까? 한 분 하나님이 왜 우리라고 하십니까? 왜 엘이 아니고 엘로힘입니까? 하나님이 원래 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체 상으로는 한 분인데, 숫적으로는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입니다. 머리 수는 성부, 성자, 성령입니다. 이 세 분이 완벽한 하나를 이루고 있기에 한 분입니다. 절대적인 일체입니다. 비슷한 게 아니고 완벽한 하나입니다. 머리 수는 세 분인데, 존재론적으로 이 세 분은 완벽히 하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숫적으로 세 분이면서 본질상 한 분이라는 것을 신학적이고 교리적으로는 ‘삼위일체’ 라고 합니다. 이 세 분이 완벽한 조화와 타협을 이루며 하나를 이룩해 가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삼위일체’ 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단일신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신입니다. 엘로힘입니다. 엘, 엘로아흐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사회적 존재라는 겁니다. 하나님도 관계적 존재라는 겁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우리라는 공동체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사람을 만들자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관계적 존재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 아닙니다. 한자에도 인간(人間)이라고 하면 사람 사이라는 뜻입니다. 세 분이 완벽히 하나로 존재하듯이, 사람도 하나님과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 공생해야 합니다. 상생해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이게 더불어 사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삼위일체로 살지만 우리도 삼위일체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 함께 말입니다. 이게 인간 본연의 삶입니다. 진화론에서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말합니다. 이것은 밀림의 논리요 주먹 논리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시듯이 상생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인간답습니다. 다시 한 번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깊이 생각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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