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21118m 원망의 진원지(민 11:1-9) 추수감사주일

20121118m

민 11:1-9

원망의 진원지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8]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9]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여러분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오히려 불만이나 원망이 더 많은 것은 아닙니까?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랬습니다. 오죽하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서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원망하다가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멸망하지 말라”고 충고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하루하루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마 전체 인원은 약 200만이 되었을 것입니다. 장정만 60만이었으니까요. 그런 대군이 사막에서 40년간 행군했습니다. 기적 속에서 살았는데 그들은 결코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불평과 불만, 원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하며 가장 많이 지은 죄가 원망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징계로 광야에서 많이 죽었는데, 원망하다가 객사한 것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들이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 진영에 불을 붙이셨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난리가 난 겁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결국 그 진노의 불을 진화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직후에 4절 이하를 보니, 이번에는 고기가 먹고 싶다고 난리입니다. 애굽에서 먹던 음식들이 먹고 싶다는 겁니다. 그 광야에서 그렇게 먹고 싶다며 불평을 터뜨리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가만히 뒀으면 그 모든 것 공짜로 먹는 건데 왜 이 광야로 끌고와서 이 고생 시키냐는 겁니다. 이어지는 10절 이하를 보면, 모세가 너무 기가 막히고 억울해서 하나님께 해댑니다. 11절 이하입니다. “[11]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좀 죽여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험한 꼴을 더는 보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여러분, 현실에 대해 자족하거나 감사하기보다는 도리어 불평하고 원망하는 현상은 대체 왜 일어나는 걸까요? 


우리 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야말로 기적 가운데 살았는데, 왜 그들은 날마다 불평할까요? 이 원망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4절 말씀이 이점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합니다. 원망의 본질과 그 원점이 무엇인지를 잘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이스라엘 백성 중 섞여 사는 다른 인종이 탐욕을 품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감사가 아닌 불평, 원망은 반드시 탐욕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탐욕을 품는 한 절대 현실에 대해 자족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리 잘해 줘도 우리가 탐욕을 가진 한 우리 성에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족하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합니다. 탐욕이 원망과 불평을 가져 옵니다. 따라서 탐욕을 내려놓지 않는 한 그 사람에게는 평생 감사란 없고 오직 불평과 불만과 원망만 있을 뿐입니다. 자족할 줄 알아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불평과 원망의 진원지가 섞여 사는 다른 인종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다른 인종>은 누구입니까? 출애굽할 때 순수 이스라엘 사람만 출애굽한 게 아닙니다. 다른 인종도 섞여 있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만 종으로 부린 게 아니라 각국에서 잡아온 전쟁 포로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 인종들이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섞여 살았고, 출애굽 때도 섞여서 나온 겁니다. 출애굽 당시의 장면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2장 37-38절입니다. “[37]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38]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장정은 60만 정도였고, 그 외에도 수많은 잡족이 라암셋에서 출발했다는 겁니다. 그들이 화근이었습니다. 그들이 원망했고 탐욕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탐욕을 품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며 모세를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원망이란 근본적으로 이방인들의 행태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탐욕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 백성들의 사전에는 원망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탐욕이 있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원망의 원점은 섞여 사는 무리입니다. 원망은 세상 사람들의 정서요 문화입니다. 믿는 사람이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께 대든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문화나 정신세계에 오염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만큼 그 사람의 영성이 세속화되어서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쉽게 하나님을 원망하는 미혹에 빠지는 이유를 짚어보겠습니다. 틀림없이 진원지는 섞여 사는 무리들인데, 왜 우리도 그토록 허무하게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느냐는 겁니다. 우선,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지난날의 은혜를 망각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생 잊어서는 안 될 하나님의 복, 날마다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감사품목 1호는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간 짐승처럼 애굽에서 노예살이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 그들을 출애굽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향해 행군하게 하셨습니다. 구원의 반열에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신분이 세상의 노예,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 믿지 않는다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뻔합니다. 아직도 세상의 종노릇하며 그게 전부인줄 알고, 그게 숙명인줄 알고 비겁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마귀가 끄는 대로 온갖 짓을 하며 살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썩 훌륭한 모습은 아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광야로 나왔고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도도한 가나안으로의 행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반열에 선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잊으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감사가 실종되며 그 자리를 원망과 불평이 차지하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보면 꼭 그렇습니다. 그들이 출애굽의 은총을 망각할 때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여호와의 은혜를 기억하라며 회개를 촉구했던 것입니다. 선지자가 항상 외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너는 그때 짐승이었고, 마귀의 하수인이었고, 저주받은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출애굽에 대한 원초적인 하나님 은혜에 대해 망각하면 반드시 그 사람의 신앙에 침체가 오고 매사에 짜증과 원망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현실이 아무리 고되어도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출애굽의 은혜를 잊지 않으면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올해도 그 어떤 복이나 은혜보다 우리를 죄와 사망, 애굽, 세상으로부터 근본적으로 구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우선적으로 감사하십시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원초적인 감사의 근거입니다. 


다음은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원망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자기가 누리는 복과 은혜에는 너무 쉽게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복을 당연시 하고 자명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살며 먹었던 일용할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그들이 처음 만나를 대하고 먹었을 때의 감격은 대했습니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꿀맛이라고 했습니다. 환상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감격이 식은 것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기름 섞은 과자 맛’이라고 합니다. 꿀맛이 기름 맛이 되었습니다. 민수기 21장 5절로 가면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처음에는 꿀맛이었다가 기름 맛이 되고 이제는 하찮은 음식이 되었습니다. 기적의 만나를 폄하하며 원망하다가 하나님이 진노하사 불뱀을 보내 그들을 물게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들은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를 먹고 반석에서 터지는 생수를 마시며, 낮에는 더우니까 구름기둥으로 볕을 가려주시고, 밤에는 추우니까 불기둥을 보내 따뜻하게 해주시고, 방향감각이 없으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샌들을 신었겠으나, 하루 종일 행군하는데도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고, 광야에서는 옷도 해어지지 않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보십시오. 애굽에서 먹던 부추 타령, 마늘 타령, 파 타령, 오이 타령, 생선 타령, 참외 타령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이제 우리 기력이 다했다’고 합니다. 기력이란 말을 개역성경은 정력이라고 했습니다. 원어로는 성적 능력이 바닥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마늘과 부추를 달라는 겁니다.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올해도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고, 지금 누리는 은혜가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올해 받은 복을 세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굶지 않고 헐벗지 않고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부도나지 않고, 파산하지 않고, 실직하지 않고, 암 걸리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아이들 가출하거나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남편이 돈 벌어 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남편을 가장으로 세워주셨기에 가장을 통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편을 잘 알지 않습니까. 남편들이 무슨 재주가 있습니다. 이 힘든 때 남편들을 통해 여러분이 지금까지 밥 굶지 않았다는 것은 원망의 사유가 될 수 없습니다. 왜 파와 부추를 찾으십니까? 감사하십시오. 진심으로 감사를 바치십시오. 


그리고 원망은 앞으로 하나님이 내게 베푸실 은혜에 대한 기대가 없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미래의 비전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릴 복과 은혜는 앞으로 더 많이 남았습니다. 최상, 최고의 복은 항상 뒤에 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씨를 심어 싹이 나는 것도 은혜와 복입니다. 꽃 피우는 것도 대단한 복입니다만, 열매는 가장 마지막입니다. 열매는 아직 남았습니다. 그러니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과정입니다. 더 많은 복이 남아있습니다. 가장 풍성한 복은 앞으로 거둘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이 없는데 무슨 기쁨이 있습니까? 소망이 있어야 지금 고되더라도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누려온 하나님의 복이 크지만 앞으로 누릴 복은 더 크다는 기대가 있어야 삶이 힘들지 않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고됩니다. 우리에게는 궁극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가나안입니다. 고된 광야를 행군하는 이유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 소망으로 우리는 삽니다. 천국이 우리의 영원한 가나안입니다. 우리 앞에 천국이 있는 한 절대 우리는 원망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천국가자는 종교입니다. 천국이야말로 우리에게 보장된 최대의 복이자 최상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천국에 대해 무덤덤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김 빠진 맥주입니다. 천국이 없는데 무슨 감사요 생기가 있겠습니까. 천국에 대해 근본적으로 관심이 없으시면 여기서 신앙생활 접으셔야 합니다. 잘못 찾으신 겁니다. 천국에 대한 대망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하는 만큼 손해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끝까지 끌려가는 것이기에 치 떨리도록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깨끗이 손 털고 애굽으로 돌아가 화끈하게 사는 게 더 낫습니다. 부디 천국을 대망하고 미래를 기대하십시오. 더 많은 것들은 우리가 앞으로 누릴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어려움을 참고 인내하며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자족하십시다. 깊이 진심으로 감사하십시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더 많은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주 안에서 복되기를 기원합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