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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8m: 마르다냐 마리아냐?(눅 10:38-42) 임직주일

2009년 2월 8일 임직주일 낮예배
본문: 눅 10:38-42
제목: 마르다냐 마리아냐?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8절입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 마을은 어떤마을입니까? 예루살렘 근교의 베다니입니다. 마르다라 이름하는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누구입니까? 언젠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의 두 여동생입니다. 주님과 이 가정과의 관계는 참으로 각별했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마다 방문한 가정입니다. 요한복음 11장 5절을 보면 예수께서 나사로와 그 동생을 사랑했다고 했고, 11장 35절을 보면, 주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사랑했으면 저렇게 울까’ 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토록 깊은 애정을 가진 마르다와 마리아 가정을 주님이 또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님을 맞이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태도가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언니 마르다는 급히 나가서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을 해서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합니다. 마르다는 적극적이고 활달하고 능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 마리아는 마르다와 정서상 반대로 보입니다. 마르다는 활동형이고, 마리아는 생각하는 형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타입이고, 마리아는 조용히 앉아 말씀 듣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타입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옳을 것 같습니까? 나는 어느 편에 속합니까?

아마 우리는 각기 다른 타입일 것입니다. 마르다 쪽일 수도, 마리아 쪽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이 둘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본문 42절을 보면 주님은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이런 평가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마르다가 더 상식적입니다. 손님이 왔으면 대접하는 게 상식입니다. 차라리 마리아는 좀 얌체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리아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셨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마르다의 불평도 그겁니다. ‘손님 대접하기에 이렇게 바쁜 데 왜 주님 앞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주님은 무엇 때문에 마리아의 선택이 옳다고 하셨을까요? 주님은 마리아의 내성적인 정서를 더 좋게 보신 겁니까? 아니면 분주하게 뛰어 다니며 일하는 것보다는 말씀 듣는 게 낫기 때문에 마리아를 두둔하신 겁니까?

마가복음을 보면 지금 주님의 이 방문은 마지막 방문입니다. 전에는 일상적인 방문이었지만, 이번은 최후의 방문입니다. 주님은 두 번 다시 이 집을 찾아오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르다는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또 한 번의 방문쯤으로 여긴 겁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이번 방문이 마지막임을 예감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접보다는 주님의 말씀 한 마디를 더 새겨 듣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만큼 마리아는 영적 감각이 마르다보다 예민했습니다. 마리아도 평소 같으면 언니를 도왔을 터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대접이 문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주님 곁에서 말씀을 듣는 게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일보다 말씀 듣기를 택한 것은 지금이야말로 비상한 때라는 영적 분별력의 결과였습니다. 주님은 이점을 높게 평가하신 겁니다. ‘너야 말로 깨어있구나!’ 하신 겁니다.

때에 대한 마리아의 비상한 감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4장,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마리아가 주님 발에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립니다. 그때도 주님을 모시던 제자들은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이 값비싼 향유를 왜 허비하느냐고 합니다. 차라리 가난한 자들을 돕는 데 쓰는 게 낫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제자를 나무라시며, 그녀가 한 일은 내 장례를 위해 한 일이라고 하시고, 온천하에 이 여인의 일이 기념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가까이서 주님을 3년간 모시고 다닌 제자들도 아직 코앞에 닥친 주님의 십자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향유를 깨뜨렸는데, 주님이 높게 평가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마리아가 주님의 장례를 위해 향유를 부었다는 겁니다. 나드와 몰약은 장례 때 쓰는 향유입니다.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고 마리아의 마음을 아신 겁니다.

그러면 마르다는 어떻게 됩니까? 42절을 보면 각주가 있습니다. 거기를 보면,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마르다의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영적 감각이 무딘 겁니다. 마르다는 맹목적이라는 겁니다. 영성이 투명하지 못하고 흐리니까 제대로 영적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영적 감수성이 예민해야 그때그때 분별이 이루어지는데,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마르다에게는 이 부분이 약했던 겁니다. 마르다는 인간적 생각이나 열정에는 충실했지만, 영성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맹목적이었습니다. 누구나 일상에 매몰되어 살면, 그래서 영성이 탁해지면, 시대의 기상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엉뚱한 짓을 하게 되고 온갖 불평을 다 내 놓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12장 56절입니다.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요즘은 기상을 관측하는 시스템이 좋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연의 현상을 보고 판단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민한 영적 감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때 일한다고 설칠 수 있고, 그 반대로 행할 수도 있습니다. 분주하다보면 자기도취에 빠지기 쉽습니다. 마르다의 경우에도, 그 분주함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혹 자기 체면이나 자기 자존심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내 영적 감수성을 보다 예민하게 만드는 일 아닐까요?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은 주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일하지 않고 말씀만 듣고 앉았느냐는 비난을 들어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시설이나 다른 무엇을 따지면 안 됩니다. 주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말씀을 듣지 않고 잔치 벌이는 데만 열중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은 말씀에 집중해야 할 비상한 때입니다.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했다는 주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이런 평가 때문에 마르다보다는 마리아가 더 좋은 평가를 받아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영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다 궂은 일은 피하고 말씀만 듣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때그때 마리아도 되어야 하고 마리아도 되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마르다처럼 맹목적이면 안 됩니다. 때를 잘 분별해서 결단하며 처신하라는 겁니다. 오늘 임직하는 권사님들은 예민한 영적 감각을 갖는 데 애쓰십시오. 그래서 늘 주님의 칭찬과 축복의 말씀을 듣는 여종들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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