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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4w: 히브리서 강해 17(히 11:1-4)


2008년 12월 24일 수요성경공부 히브리서 강해 17

본문: 히 11:1-4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11장은 유명한 믿음장입니다. 믿음의 정의, 규정이 나오고, 믿음의 선진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우리에게 익숙한 믿음에 대한 정의입니다. 참으로 좋고 은혜로운 말씀입니다만, 막상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설명이 잘 안되는 말씀입니다. 1절은 우선 믿음을 두 가지로 정의 합니다.

먼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실상은 구체적인 그림이란 뜻입니다. 입체적인 모양이다는 뜻입니다. 아직 성취된 것이 아니지만, 아직 응답받은 상태는 아니지만, 그 바라는 것의 실체를 미리 앞당겨 보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뜻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을 보면, ‘믿고 기도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같은 말씀입니다. 자기가 기도하는 것에 대해 이미 받았다고 여기면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면 그대로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보다는 불신으로 기도합니다. 과연 이게 될까? 이 기도가 응답될까? 주님은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불신으로 기도하면 안 이루어집니다. 안 이루어지는 그림을 그리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자기가 바라는 것을 실제 이루어진 것처럼 생생하게 그리면서 기도하면 그대로 된다는 겁니다. 바라는 차원이 현실이 된다는 겁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자기가 소망하고 자기가 기도하고 자기가 바라고 기대하는 것을 생생하게 그리라는 겁니다.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답게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큰 빗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도하기 전에 이미 자기가 바라는 큰 비를 생생하게 느낀 겁니다. 큰 빗소리가 들린다는 겁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비를 내려 주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이미 그 귀에 빗소리를 들으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종달새 알에서 이미 종달새의 소리를 들으라는 겁니다. 그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종달새 알에서 종달새 소리를 듣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귀를 가까이 갖다 대어도 안 들립니다. 내가 믿음으로 앞당겨 보는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내가 믿음으로 듣는 소리 그대로 큰 비가 내린다는 겁니다. 내가 믿음으로 듣는 그대로 종달새 알에서 종달새 새끼가 깨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무섭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못 할 일은 없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안 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믿음으로 생생히 우리 앞에 그림을 그리고 기뻐하고 감사하면, 반드시 그 소망의 차원이 현실로 이행한다는 겁니다.

다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증거라는 말은 보증, 담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은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계심을 압니다.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육신은 죽어 흙으로 가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늘로 간다는 사실을 압니다. 어떻게요? 믿음으로 압니다. 믿음이 이런 것들의 유일한 물증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굳건하고, 믿음이 있으면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우리에게 너무 소중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내 구원,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믿음은 보험은 아닙니다. 안 믿는 것보다는 믿는 게 나은 것, 이런 차원은 아닙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은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가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이렇게 규정하고, 믿음의 선진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사람은 4절에 나옵니다.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후 두 아들을 낳는데, 첫째가 가인이고, 둘째가 아벨입니다. 이후 형인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형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형인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셨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가인이 시험에 듭니다. 안색이 변하고, 분해서 몸을 떨며 마침내 아벨을 돌로 쳐 죽입니다. 우리의 의문은 어째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는가 하는 겁니다. 전통적으로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가인은 양을 바치지 않고, 곡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대개는 이렇게 주석하고 해석합니다만, 이런 해석은 옳은 것 같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을 피에 굶주린 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이 때는 피를 바치는 모세의 율법 이전입니다. 가인이 곡물을 곡식으로 드린 것은 자신의 직업이 농부였기 때문이고, 아벨이 양을 바친 것은 아벨의 직업이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두 형제가 드린 제사의 차이를 오늘 본문 히브리서는 ‘믿음의 차이’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차이가 있는 이 두 형제가 드린 제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보겠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3-4절입니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삼았고, 가인은 자신의 첫 소산이 아닙니다. 결국 아벨은 준비된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자기의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냥 자기가 먹던 곡식을 하나님께 드린 겁니다.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렸다는 겁니다. 이것은 상상이나 추측이 아니라 실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열납하시지 않자, 가인의 안색이 변했고 분을 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4장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이미 가인의 삶이 올바르지 못했다는 겁니다. 주님도 마태복음 23장 35절에서 이렇게 아벨을 ‘의인 아벨’이라고 합니다. 돌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부터 이미 의인의 사람, 믿음으로 산 사람입니다. 그래서 양의 첫 새끼로 제물로 삼아 하나님이 흠향하시기에 합당한 제사를 바친 겁니다. 요한1서 3장 12절은 가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즉 가인은 살인자 이전에 이미 불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가인에게는 믿음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저 형식적으로 대충 자기가 먹던 곡식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답시고 바친 겁니다. 유다서도 사람들의 온갖 죄악을 고발하면서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다 가인의 길로 걸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찬송도 불렀지만, 그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겁니다. 믿음 없는 예배는 종교의식일 뿐입니다. 쇼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겁니다. 아벨은 많은 양 중의 한 마리를 드린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린 겁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양 한 마리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 신앙고백을 받으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벨의 제사는 오늘 본문 4절이 말씀하는 대로, 가인보다 훨씬 나은 믿음의 제사입니다. 무엇을, 얼마를 드리느냐가 아니라 믿음의 표현으로 드리는 제사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예배에 임하는 태도, 예물 드리는 자세에서 다 폭로됩니다. 그게 믿음인지 불신인지, 참인지 거짓인지 다 드러납니다. 예배는 속일 수 없는 그 사람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가인의 길을 가지 마십시다. 가인의 길은 불신의 길이었습니다. 가인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믿음으로 예배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바친 제사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피의 제사가 아닙니다. 아벨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을 노래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듣기: https://drive.google.com/file/d/1Ffm664W_yMc8wmG0-CX7P1lqMQPIWQf-/view?usp=sha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