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id": "xe-1194",
  "title": "20081214m: 다말(마 1:1-6)",
  "authors": [],
  "category": "sermon",
  "dates": {
    "registered_at": "2008-12-14T20:05:06",
    "original_updated_at": "2008-12-14T20:05:48",
    "published_on": null,
    "delivered_on": null
  },
  "tags": []
}
---
<!-- paragraph:p0001 -->
<p>2008년 12월 14일 대림절 셋째주일/성서주일 낮예배<br>본문: 마 1:1-6<br>제목: 다말</p>
<!-- paragraph:p0002 -->
<p>[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p>
<!-- paragraph:p0003 -->
<p><br>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나 이력을 감추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부끄러운 사건이나 치부한 이력을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까발립니다. 사람들은 성경이라고 하니까 거룩한 경전이기에 당연히 성스럽고 아름답고 훌륭한 이야기만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아시는 바대로 온갖 인간사의 추악한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족보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니까 그 조상들도 다 훌륭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p>
<!-- paragraph:p0004 -->
<p>우선 1장 1절에 나오는 낱말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여기서 세계는 세상이 아니라, 계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족보의 특이한 점은 우선 여성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에는 여성들이 족보에 오르지만, 유대인들 사회에서 여인들은 사람 수치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이례적으로 여성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당시의 관례나 통념을 깨는 파격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여인들이 조신하거나 품행이 방정하지 않고, 대개는 이방 여인들이거나 전혀 모범이 되지 못하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다 문제가 있습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그리고 마리아가 족보에 나오는데, 마리아 외에는 다들 형편없습니다. 전통 유대인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삶이 건강하거나 아름답지 못한 여인들인데 어째서 예수님의 계보에 이들의 이름이 오를 수 있느냐는 겁니다.</p>
<!-- paragraph:p0005 -->
<p>3절에 나오는 첫 번째 여인은 다말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아들이고,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고 합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부부지간이 아닙니다. 이런 망측한 일이 어디있습니까?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쌍둥이를 낳았다는 겁니다. 원래 유다는 엘, 오난, 셀라 3형제를 두었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의 관습법에 형이 후사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형의 대를 잇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명기 25장에 나오는 혼인법인데, 시혼 혹은 시형제 결혼법이라고 합니다. 이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중동 지방에는 어디에나 있었던 관습법입니다. 따라서 유다도 첫째 아들인 엘이 자식 없이 죽자, 둘째 아들 오난으로 하여금 형수 다말과 결혼해서 형의 대를 잇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문제는 형수와 결혼한 온난은 어떤 판단을 했는지 형의 대를 이어주고 싶지 않아, 형수와 잠자리를 할 때 체외 사정을 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저주를 사서 오난 마저 급사했습니다. 두 번째 남편 마저 잃게 되자 다말의 심정이 얼마나 절망스러웠겠습니까? 이때 시아버지인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 막내아들 셀라를 주어야겠지만 아직 어리니 친정에 가 있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말이 시아버지의 권면을 받아들여 친정으로 갑니다. 그런데 친정에 가서 아무리 기다려도 유다가 불러주지 않습니다. 세월이 제법 흘렀습니다. 벌써 시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셀라도 성인이 되었는데, 불러주지 않는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정에 가있던 다말이 기가막힌 소식을 듣습니다. 시아버지인 유다가 양털 깎는 일로 친정 가까운 딤나로 온다는 겁니다. 그때 다말이 대단한 계략을 꾸밉니다. 당장 과부의 옷을 벗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요염한 자태로 딤나 성문에 섭니다. 원래 다말이란 이름은 종려나무란 뜻입니다. 아마 다말이 이름만큼이나 외모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예상대로 시아버지 유다가 성문에 나타났습니다. 유다가 지나다 말고 다말에게 와서 수작을 겁니다. 그러자 다말이 화대로 무엇을 주겠냐고 합니다. 그러자 유다는 내일 염소 한 마리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말은 담보물을 맡겨 두라고 합니다. 그러자 시아버지 유다가 목에 걸고 다니던 인장과 지팡이를 맡깁니다. 그날 밤 다말은 자기가 계획하고 각오한 대로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습니다. 이튿날 유다는 약속한 대로 염소 한 마리를 보냅니다. 그러나 종이 갔을 때는 이미 다말은 거기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나 유다가 이상한 소문을 듣습니다. 친정에 가 있는 며느리 다말이 임신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다는 당장에 그년을 잡아와서 화형을 시키라고 합니다. 정말 유다 앞에 다말이 끌려왔습니다. 다말은 어떤 처분이든 달게 받겠으니 죽기 전에 이 물건의 주인을 찾아 주십시오 하면서 유다가 맡겼던 담보물, 인장과 지팡이를 내놓습니다. 유다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때 유다가 크게 뉘우칩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합니다. 내가 막내 셀라를 주지 않자 그렇게라도 후사를 남겨 우리 가문에 남으려고 했구나 하면서 며느리의 처신을 수용하고 동정합니다. 그래서 낳은 자식이 쌍둥이인데,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p>
<!-- paragraph:p0006 -->
<p>사실 이 사건은 불경스럽기 짝이없는 패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여인이 예수님의 성스러운 족보에 올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륜의 아들 베레스가 유다 지파의 가계를 잇는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 주자가 됩니다. 결국 다윗의 조상이 되고,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p>
<!-- paragraph:p0007 -->
<p>우선 다말이 그렇게 까지 모험하며 유다 가계를 고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그 가계가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 가계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그 가계에 남으려고 했던 겁니다. 남편 둘씩이나 잡아먹은 년이라는 소리를 들을망정 그 가계에 남으려고 했습니다. 다말로서는 유다 가문에 남으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패륜을 감행해서라도 유다 가계에 남겠다는 겁니다. 마치 그녀의 시조부인 야곱과도 같습니다. 야곱은 차남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어이 하나님 축복의 약속을 자기가 승계하겠다는 신념으로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장자권을 강도질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것을 용서하셨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패륜인데, 하나님은 그 야곱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아니라 차남인 야곱을 통해 축복이 승계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째서 그를 용서하셨을까요? 비록 율법을 범하고 저주를 부르는 일이라도, 하나님 축복의 계보에 남는 일이라면 패륜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필사적인 믿음을 높이 사신 겁니다. 다말의 도박 배후에는 필사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시아버지 유다에 대한 보복극이 아닙니다. 정말 다말은 시조부인 야곱 못지 않은 집념과 모험의 여인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녀의 부도덕한 행위보다는 죽음을 무릅쓰고 감행한 모험적인 신앙을 보시고 최초로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예를 허락하신 겁니다. </p>
<!-- paragraph:p0008 -->
<p>물론 야곱의 얘기나 다말의 얘기는 충분히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 목적이 선하다 해도 부정한 수단이나 방법이 정당화 될 수 있느냐?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칠 수 있느냐? 헌금을 위해 절도할 수 있느냐? 목적이 숭고하면 할수록 그 수단과 과정도 옳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말 사건을 통해 우리는 구원의 목적 앞에서는 그 수단의 합법성, 투명성이 다 공허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을 벌려고 나쁜 짓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떤 짓도 불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을 상대화 한 것입니다. 물론 인륜을 저버리면 안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반열에 서기 위해서는 저주도 죽음도 모험해야 합니다. 윤리, 도덕, 인륜, 율법은 다 구원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구원을 포기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p>
<!-- paragraph:p0009 -->
<p>여러분, 여자면서도, 그것도 근친상간의 패륜을 저지르면서도 주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 다말을 기억하십시다. 구원을 자신의 최고 가치로 여기고 모든 것을 상대화시킨 그 살인적인 용기를 배웁시다. 구원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바치고 희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남편 둘이 아니라 셋까지도 잡을 수 있고, 시아버지가 아니라 그 이상의 다른 것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다말은 구원에 환장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야곱에게 한 것처럼 다말에게도 항복하셨습니다. 성탄의 계절에 최초로 주님의 계보에 오른 다말 이라는 이 가공할 믿음과 목숨을 건 모험을 통해 도전받으시고 구원이 대체 무엇인지를 새삼 숙고하시기를 기원합니다. <br></p>
<!-- paragraph:p0010 -->
<div><!-- paragraph:p0011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span></div>

<div class="archive-resource-links"><a href="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lUpacKodN_8%24" title="원문 미디어 링크 (이용 상태 미확인)"></a></di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