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마라나타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이 벌써 대강절 첫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이란 성탄절을 4주 앞두고 매주 촛불을 하나씩 밝혀가며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민족 시인이자 승려 시인인 한용운의 싯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오세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됐어요. 어서 오세요. 당신이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 없이 그 분이 오실 수는 없습니다. 나의 기다림과 그 분의 오심은 별개가 아니고 동시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만나지 않은 것도 님이 아니요
 이별이 없는 것도 님이 아닙니다.
 님은 만났을 때 웃음을 주고 떠났을 때 눈물을 줍니다.
 만날 때 웃음보다 떠날 때 눈물이 좋고
 떠날 때 눈물보다 다시 만나는 웃음이 좋습니다.
 아, 님이여 우리의 다시 만나는 웃음은 어느 때 있습니까?>
참 마음에 사무치는 글입니다. 맞습니다. 나를 울게한 그 분이 올해도 반드시 나를 다시 웃게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정말 기다림의 민족입니다.
그 숱한 야화가 다 기다림으로 차있습니다. 망부석 같은 얘기는 참 한국적입니다. 아이를 업은 어미같이 생긴 바위를 보고 저게 바로 기다리다 지쳐 돌이 되어버린 어느 여인이라고 한 것은 기다림에 지친 우리 민족의 정서를 거기에 투영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실은 기독교도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특히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고대하는 신앙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당시의 예배 형식을 보면 사회자가 큰소리로 <내가 속히 오리라!>하고 외치면 성도들은 일제히 <마라나타!>하고 응답하며 예배를 마쳤는데, <마라나타>란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의 히브리말입니다.
성경의 제일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마라나타>(계22:20)로 끝납니다. <마라나타>가 곧 예배의 결론이자 신구약 성경의 결론이며, 기독교의 결론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마라나타>의 소망과 기도가 없는 사람은 좀 곤란합니다.
아니, 기다려지지도 않는 이가 어떻게 님일 수 있습니까? 님이 어떻게 기다려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올해도 주님은 반드시 새롭게 성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결코 그 분에 대한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지구촌에 몰아닥친 환란의 바람으로 온 세계가 떨고 있고, 삶에 지쳐 아무렇게나 자신을 내던져버리는 이웃들도 점점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 세상을 향해 주님이 꼭 오신다는 소식을 전합시다.
그게 바로 이 시대 기독교의 메시지요 또 우리 믿는 자들의 신성한 의무임을 깨달읍시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