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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바울은 골로새서에서 &lt;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말에나 일에나 다 하나님께 감사하라&gt;(3:15-17)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단순한 게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사한 일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항상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은 자칫 현실을 지나치게 낙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결코 감사할 일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행한 일 억울한 일 안타깝고 속상한 일이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따라서 남은 우는데 나만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것은 자칫 삶을 조롱하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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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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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실제 바울도 기쁨이나 감사보다 차라리 고난과 아픔을 더 많이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우선 모진 병을 지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병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바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lt;마치 몸을 찌르는 가시&gt;와도 같은 것이었고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 영적인 위축까지 가져온 &lt;사탄의 사자&gt;(고후 12:7)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그 병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하나의 저주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lt;너희를 시험할 만한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너희가 나를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나를 영접하였도다&gt;(갈 4:14). 뿐만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와의 관계도 그를 몹시 힘들게 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를 쓸 무렵에는 고린도교회 내부에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많이 발생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것은 역시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들은 &lt;바울의 편지는 힘이 있어 좋은데 실제 그를 대하면 외모가 너무 빈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gt;(고후 10:10)며 그의 사도성을 부인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자고로 다른 이들을 압도하는 외적인 권위와 카리스마가 있어야 함에도 바울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바울은 말이 부족하다는 그들의 지적을 솔직히 시인합니다(고후 11:6). 그러나 이것은 케제만이나 라이첸슈타인의 지적처럼 당시 고린도 지방에 유행하던 헬레니즘의 신비주의처럼 이상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열광적인 언변술이 없었다는 뜻이지 지식이나 논리나 두서가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헬레니즘의 신비종교에서는 사람들을 황홀경으로 몰아가는 주술적인 웅변술을 곧 신의 영에 접한 증거로 믿었는데 바울에게는 그런 면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바울이 감사의 서신인 골로새서와 기쁨의 서신인 에베소서를 쓸 때는 로마 감옥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의 생애에 가장 힘들고 외롭고, 가장 처절한 환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렇듯 기쁨과 감사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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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2">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 &lt;해산의 수고와 고통&gt;을 말합니다. 해산이란 몹시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게 결코 즐거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즐겁지 않다고 해서 기쁨마저 없다는 얘기는 아니며 감사하지 않다는 얘기는 더 더욱 아닙니다. 죽도록 아프고 힘들지만 또 세상에서 그보다 더 기쁘고 더 감사한 일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고통과 기쁨, 아픔과 감사는 얼마든지 동시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그게 비록 고통의 극한까지 가는 일이라 해도 얼마든지 기뻐하고 행복해 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고통이 즐거움은 앗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기쁨과 감사마저 빼앗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 부모는 그 어떤 희생이나 고난도 다 기쁨과 보람과 감사로 견딜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쁨과 감사는 사랑의 대상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을 때 발생합니다.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주님의 존재 자체로 충만할 때 우리 역시 바울과 같은 감사의 달인이 될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맞을 일이 있으면 맞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매, 사랑하는 이의 분노, 사랑하는 이의 강요에 쫓기는 희열도 느낄 줄 알아야 비로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바울의 그 역설의 기쁨과 전천후의 감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