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23m: 포기하지 않음(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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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23일 주일낮예배
본문: 요 5:1-9
제목: 포기하지 않음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얘기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이적입니다. 아마도 중풍 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거기에는 병자들이 많았습니다.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겁니다. 어쨌든 이런 민간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나타나서 많은 환자 중 가장 오래된 38년 된 병자를 찾아와서 그 병을 고쳐주십니다. 주님이 사전에 현장을 답사하신 것도 아니고, 예약된 환자를 찾아간 것도 아닌데,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되어 있다는 듯이 주님이 다른 환자 사이를 뚫고 거침없이 그 환자에게 다가가신 겁니다. 왜 주님이 하필이면 38년 된 환자를 찾아가셨을까요? 그가 가장 오래된 환자여서 거기 환자들의 대표쯤 되어서 그렇게 하신 겁니까? 아니면 38년이나 병으로 앓았기에 불쌍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은 중풍을 맞고 쓰러져 38년간 그 연못가에 누워 있으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여전히 낫고자 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병이 나으려면 남과 경쟁을 해야 하는데, 이 사람으로 말하면 경쟁력 제로입니다. 그런데도 분수에 맞지 않게 체념을 모릅니다. 생의 신념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7절입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친구도, 가족도 다 떠난 자리에 홀로 누워 있으면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안타까움에도 그는 끊임없이 못에 들어가고자 시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스스로 그를 찾아가신 것보다는 그 환자가 주님을 불러 호출당해서 가신 겁니다. 38년 된 환자가 가진 불굴의 집념에서 나온 믿음이 주님을 자기에게로 오게 한 것입니다. 믿음의 기 싸움은 다 이렇습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주님이 우리에게 져 주십니다. 그래서 불행한 상황을 종료하시며 그간의 아픔을 보상하시며 그 절망스런 현실을 반전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포기하면 지금까지 당한 손해나 아픔이 그저 불행으로 마치는 겁니다. 본문의 이 절망적인 환자를 보십시오.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못에 들어갈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님을 호출할 수 있었고,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선언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주님이 반드시 우리 눈앞에, 우리 삶의 현장에 출두하십니다. 우리의 아픔과 모순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이방 여인인 수로보니게 여인 아십니까? 예수를 좇아가며 계속 소리칩니다. ‘내 딸이 귀신들렸나이다.’ 하도 크게 소리치니까 나중에 제자들이 시끄럽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더 크게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님이 그녀를 불러세워 좋은 말씀을 하셨나요? ‘자녀의 떡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너는 개같은 이방 여인이니 너한테 은혜를 베풀 수 없다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 심한 모욕이 없습니다. 적선할 생각이 없으면 쪽박이라도 깨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그 가나안 여인이 체념하고 돌아갔습니까? 아닙니다. ‘옳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개도 주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먹지 않습니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십시오’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네 믿음이 크다며 안심하고 가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녀가 포기했다면 딸은 낫지 못했습니다.
다음 주일이 벌써 대강절 첫째 주일입니다. 성탄절 하면 많은 사람이 떠오릅니다만, 그중에서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탄 하신 아기를 품에 안았던 시므온 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지도 않겠다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어이 그는 성전에서 성탄 한지 8일째 되는 주님을 품에 안았습니다. 그가 감격하며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습니다. 안나 라는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려 74년을 주님을 뵈려고 성전에서 금식하며 살았습니다. 포기하면 불행으로 끝납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은 반드시 나타나십니다.
야곱도 얍복 나루에서 동이 터오는데도 하나님을 놓아주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기어이 하나님이 야곱의 허리뼈를 치십니다. 환도뼈를 쳤는데도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고 놓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내가 졌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는 뜻의 새 이름, 이스라엘 이란 이름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무한한 복을 베푸신 겁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장면입니다. 세상에 그 사건만큼 황당한 사건은 없습니다. 이토록 말도 안 되는 비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번제는 목을 따 피를 받아 제단에 뿌리고, 고기는 부위별로 각을 떠 제단 숯불에 알뜰하게 불살라야 합니다. 양을 잡아 번제를 드리듯 100세에 얻은 독자를 그렇게 바치라고 한 겁니다. 더 기막힌 것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정말 제 아들을 잡으려고 목에 칼을 대었습니다. 이쯤 되면 아비 됨을 그치는 정도를 넘어 완전히 미친 사람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보며 이 부분이 가장 난해하고 벅찼습니다. 저는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척하며 적당히 쇼를 했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아들을 잡으려고 목에 칼을 댔거나 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을 보다가 감짝 놀랐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쇼한 것도 아니고, 체념한 것도 아니고, 희망을 품고 그랬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릴 줄 믿었다고 합니다. 그는 100세에 얻은 독자의 목을 따면서 희망에 믿음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니었습니다. 죽어도 하나님이 다시 살린다는 겁니다. 이것을 믿었기에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쇼하지 않고 정말 아들의 목을 따려고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급해졌습니다. ‘아브라함아, 이삭의 목에 칼을 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내리십니다.
우리의 사태가 아무리 최악이라 해도, 100세에 얻은 외동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댈 만큼 난이도가 높지는 않을 겁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시면서 체념하지 마십시오. 38년 된 환자처럼 주님을 여러분 앞에 호출하시고, 야곱처럼 주님을 이기고 새 이름을 얻으시고, 아브라함처럼 주님을 다급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시험과 곤경을 극적으로 이기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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