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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8m 이 성전을 헐라(요 2:13-19)

20121028m

요 2:13-19

이 성전을 헐라!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오늘은 종교개혁 495주기 기념주일입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으로 간주해서 그렇습니다. 사실 종교개혁의 원조는 루터 이전에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으로, 이것은 네 군데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하신 것으로 나오지만, 요한복음은 주님의 공생애 초기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 생애 마지막에 이 사건을 배치한 공관복음서의 얘기가 아마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은 성전을 난장판으로 만든 사람들에게 격노하시며 그들을 다 몰아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의 표현은 더 신랄하고 과격합니다. 만인의 기도하는 집을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1장 15절 이하를 보면, 젊은이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주님께 갈채를 보냈는데 반하여, 성전 주인을 자처하던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은 이를 갈며 네가 무슨 권리로 이런 짓을 행하느냐며 대들었습니다.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들의 입장으로 보면 당시 주님의 행동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성직자들이 따로 있는데, 누구도 주님께 성전 숙정의 권한을 준 적이 없는데, 갑자기 시골뜨기 청년이 나서서 순식간에 성전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놨으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사건입니까? 당시 주님이 겨냥하신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에서 예배하려면 제물이 필요한데, 먼 데서 오는 사람들은 제물을 성전 가까이서 구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성전세나 이런 것을 위해서는 돈을 바꿔야 하는데, 성전 안에서는 유대 돈 세겔만 사용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국환은 다 바꿔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 제물을 파는 시장을 조성하고, 순례객들의 환전을 도운 겁니다. 이렇게만 보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인의 기도하는 집을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들은 순례객들이 양이나 비둘기나 염소를 외부에서 준비해 오면 무슨 트집을 잡아서라도 퇴짜를 놓았습니다. 흠이 있고, 티가 있다고 했습니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제사장이 제물로의 적합성을 꼼꼼하게 따진 겁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반입한 제물은 부적절 판정을 하였습니다. 성전 뜰에서 파는 제사장이 공인한 제물을 바쳐야 되었습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싸게 파는 성전 뜰에서 파는 짐승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환전도 마찬가집니다. 외국 돈으로는 성전세를 낼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어 놓고, 터무니없는 환율로 폭리를 취했는데, 그 사람들이 다 제사장들이 고용한 하수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들의 횡포와 강도 행각에 대한 주님의 분노가 터진 겁니다. 평소 주님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흥분하고 채찍을 휘두르며 폭력을 행사하셨습니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의 가톨릭에 대한 분노도 바로 그런 겁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이 지금 바티칸으로 쓰고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을 짓다가 자금이 달려서 소위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교황 레오 10세가 면죄부를 발행했습니다. 막대한 성 베드로 성당 건축비를 조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면죄부는 부적입니다. 그걸 사면 사는 만큼 죄가 사해진다는 겁니다. 특히 이 면죄부의 효험은 살아생전 이렇다 할 공적을 축적하지 못해 천국에 못가고 지금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효과가 있는 것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연옥에 대기 중인 조상들을 위해 살아있는 후손들이 면죄부를 사면서, 돈 통에 그 돈이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겁니다. 또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 면죄부를 사면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당시 가톨릭의 신부로 독일 중부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교수 노릇을 하며 성경도 가르쳤습니다. 구약의 시편, 신약의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가르쳤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루터를 괴롭히는 게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배운 가톨릭의 교리와 성경의 가르침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심한 갈등과 회의를 겪던 루터가 한 번은 공무로 로마 바티칸을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로마를 간 루터가 수많은 순례자들처럼 로마의 바티칸 돌계단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바티칸은 서서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 계단을 다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야 했습니다. 루터도 아무 생각 없이 무릎으로 그 바티칸 계단을 기어 올라가다가 중간쯤에서 엄청난 회의에 빠집니다. 지금 이게 과연 성경의 가르침인가? 이래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인가? 바로 그때 그의 맘을 뜨겁게 하며 떠오른 성경구절이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래서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안 돌아보고 그 길로 독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일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면죄부 사건이 터진 겁니다. 그래서 마침내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정문에 95개조의 대자보를 부쳤습니다. 이게 종교개혁의 발단입니다. 이 날로부터 세어 보니 올해가 종교개혁 495주기가 된 겁니다.


당시 루터가 제시한 종교개혁의 원리는 세 가지입니다. 

우선 오직 믿음(sola fide)입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지 공적으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톨릭은 인간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행위를 강조하지만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천국의 상급을 위해 선행과 자선을 하는 것이지 구원을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점에서 가톨릭과 개신교가 다릅니다. 이것은 가톨릭이 가장 중시하는 핵심 교리에 대한 반론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기치가 오직 믿음입니다.


다음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타락의 근본적 원인이 성경이 아니라 교황의 교서에 모든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톨릭 신도들은 중세 때만 해도 개인적으로 성경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성경이 다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라틴어를 아는 사제들이나 성경을 볼 수 있지, 일반 성도들은 성경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은 성경이 아니라 교황의 교서를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게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가톨릭 타락의 근본 원인이라고 본 겁니다. 그래서 루터는 제일 먼저 착수한 작업이 성경번역 작업입니다.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독일 사람들은 루터가 당시에 독일말로 번역한 루터 번역 성경을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교황의 교서를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규범이라고 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오직 은혜(sola gratia)입니다. 이것은 교황과 같은 중보자나 고해성사 같은 중보의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주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왜 주님과 우리 사이에 왜 교황이 끼어드냐는 겁니다. 이것은 마리아 숭배나 성자숭배, 교황의 절대 무오성을 다 부정하는 겁니다. 우리는 직접 주님을 뵙고 우리 사정을 호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 세 가지 기치로 집약됩니다. 이게 종교개혁의 이념이요 철학입니다. 루터의 이런 종교개혁이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유럽에 번져갔습니다. 그러니까 위기의식을 느끼고 교황청에서 루터를 파문합니다. 너는 더는 사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루터는 그 파문장을 학생들을 모아놓고 불 지릅니다.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H. Zwingli)라는 개혁가가 루터에 동조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칼빈(J. Calvin)이 가세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낙스(J. Knox)가 가세합니다. 마침내 프로테스탄트, 즉 저항자, 반항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이게 우리 개신교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루터는 63세로 소천하여 아인스레벤에 묻힙니다. 칼빈도 55세까지 삽니다. 츠빙글리는 48세 때 가톨릭 신자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여러분, 성전개혁이나 종교개혁은 굳이 예수님 시대 유대교나 루터 시대의 가톨릭에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개신교의 정체성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기치가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입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현실에 타협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모순과 거짓에 저항하며 부단히 교회의 본래 모습과 정신을 추구하며 계승하는 게 개신교도들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반복적으로 개혁되어야 거룩하고 건강한 교회로 남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출범했지만 개신교도 부단히 자기 개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신교회는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주님 시대의 유대교처럼, 중세 루터시대의 가톨릭처럼, 이 시대의 개신교회도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 장사하다가 다 망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한마디로 난장판입니다. 한국교회치고 강도의 소굴 아닌 곳이 어디며, 장사 안 하는 교회가 과연 몇 교회나 될까요? 그 옛날 성전 안에서 상거래 하던 일이 이 시대 교회 안에서는 안 일어나고 있습니까? 요즘은 교회의 모범적인 사람을 장로로 뽑지 않습니다. 사장이나 회장급을 장로로 뽑습니다. 그래서 교회나 장로 되는 사람이 서로 좋은 일만 합니다. 우리 교회는 별 볼일 없지만, 큰 교회의 장로 선거는 뜨겁습니다. 각 교단장 선거 같은 경우 매년 교단마다 부정선거 후유증으로 큰 시험에 빠집니다. 왜 다들 이렇게 장로나 노회, 총회의 임원이 되지 못해 안달일까요? 갑자기 소명감이 뜨거워져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제는 교회 십자가가 영광의 면류관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부담은 줄고 권한만 늘어서 그렇습니다. 요즘 대형교회 부서장만 되어도 큰 돈을 자기 권한으로 집행합니다. 그 재미가 보통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수억 수십억씩 돈 쓰는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이 오늘 우리 시대 한국교회에 오신다면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너희가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도다. 너희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이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실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하나도 틀림없이 말씀하실 겁니다. 채찍을 휘두르며 우리를 다 몰아내실 겁니다. 구약 말라기 1장 10절에는 ‘너희 중에 제발 저 성전 문을 닫아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발 저 성전 문을 폐쇄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외입니까? 당연히 우리 교회도 개혁되어야 합니다. 더 깨끗하고 투명한 모습으로 갱신되어야 합니다. 내 신앙과 내 삶부터 갱신하는 개혁의 기수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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