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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두 왕국과 그리스도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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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본디 프로테스탄티즘, 즉 개신교는 루터주의자들의 루터교(lutheran church)와 칼빈주의자들의 장로교(presbyterian church)로 시작됐습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을 통해 출범한 만큼 둘 다 &lt;개혁교회&gt;(reformierte Kirche)라 불러 옳을 듯한데 서구 교회의 오랜 전통은 오직 장로교만을 개혁교회라 명명해 왔습니다. 이유가 뭘까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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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역사적으로 보면 루터교는 소위 &lt;두 왕국설&gt;(Zwei-Reiche-Lehre)을 빙자해 그들의 개혁 의지나 정치적 태도가 극히 타협적이거나 소극적이었던데 반해 칼빈의 사상을 추종하는 장로교는 &lt;그리스도 통치설&gt;(Koenigsherrschaft-Christi-Lehre)에 굳게 서서 그들의 개혁 혹은 정치사회적입장을 적극적으로 견지해 왔기 때문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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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그렇다면 루터주의자들의 &lt;두 왕국설&gt;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도성과 세속 도성,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를 구분하고 피차 불간섭을 원칙으로 하는 이원론입니다. 우리나라도 수입하여 헌법에 명시하고 있는 영미의 정교분리 원칙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히틀러의 만행 앞에서 독일교회가 그토록 무능하게 방관 내지는 동조하고 나섰던 것은 루터주의의 두 왕국설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즉 루터교회가 나치 정권을 국가의 권위로 인정하고 불간섭 원칙을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독일 천하를 한 손에 틀어잡은 히틀러가 마침내는 교회마저도 그의 시녀로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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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그러나 그 어두운 시대에도 예언자들의 청정한 육성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개혁교회 신학자, 목회자들의 저항이었습니다. 사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나치 하의 독일 교회에서만큼 장로교의 개혁정신과 루터교의 타협정신이 극명하게 대립된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당시 독일의 개혁교회가 다 히틀러에 대한 저항운동에 나섰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치정권에 항거하여 칼빈의 &lt;그리스도 통치설&gt;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소위 &lt;고백교회&gt;(Bekennende Kirche)라는 지하교회를 급조하고 칼 바르트, 본회퍼, 니묄러 같은 유수한 신학자들을 지도자로 세웠는데, 당시 고백교회 투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역시 1934년 5월에 있었던 &lt;바르멘 대회&gt;입니다. 독일 중부의 작은 도시 바르멘에 고백교회 대표 126명이 모여 히틀러에 대한 여러 가지 저항 방안들을 논의하고 마지막으로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게 저 유명한 &lt;바르멘 신학적 선언&gt;(Barmer theologische Erklaerung)입니다. 칼 바르트가 기초한 그 바르멘 신학적 선언은 고백교회의 신앙고백이요 개혁교회 전통의 예언자적 신념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기화로 히틀러는 무수한 고백교회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1935년에는 500명, 1939년에는 7000명의 목사, 신학자들을 잡아들였는데 그들은 모두가 결연하게 자신들의 신념을 지켰고, 또 그들의 그러한 순교적 항거가 있었기에 전후 독일교회의 눈부신 재건도 가능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도 나치 하의 고백교회는 독일교회의 양심으로 남아 있고, 장로교 개혁정신의 불후의 사표가 되고 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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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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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그렇다면 칼빈의 그리스도 통치설이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통치란 우주적이고 통전적이라는 것입니다. 일체의 세계 질서가 다 그리스도의 주권,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에는 결코 예외적인 성역이 있을 수 없으며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도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다 그리스도의 통치 이념으로 부단히 개혁되어야 한다는 신념입니다. 칼빈은 이런 원칙으로 종교개혁 당시 제네바에서 신정까지 시도했고, 그런 그의 정치사회적 개혁의지가 여러 시행상의 착오에도 불구하고 독재와 폭정에 대한 저항의 권리라든가 근대 민주정치의 초석이 되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듯 칼빈주의의 전통은 일원론적이며, 삶의 모든 장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되어야 하고 혹여 그렇지 못한 영역이 있다면 기어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는 삶이 바로 &lt;개혁&gt;이고 &lt;하나님 나라&gt; 구현이라는 것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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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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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종교개혁 495주기, 이 나라 교회와 정치사회 현실이 개혁교회 전통의 &lt;그리스도 통치설&gt;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하고 결단하게 하는 요즘입니다. </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