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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21007n 나를 따르라(눅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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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20121007n</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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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02 -->
<p class="p1"><span>눅 9:57-62</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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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나를 따르라!</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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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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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히틀러에게 처형당한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있습니다. 그분이 쓴 책 가운데 &lt;나를 따르라&gt;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7장 산상보훈을 해석하며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을 다룬 기독교 윤리학 책입니다. 거기에 보면 본회퍼가 제자라는 쉴러(Schueler) 대신에 나흐폴게(Nachfolge, 뒤따르는 자)를 씁니다. 주님도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62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너는 내 제자가 되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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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주님이 길을 가다가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본문의 세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보겠습니다. 이 세 사람은 결국 주님을 따르기에 합당치 못한 자들입니다. 주님을 뒤따르기에 합당치 못한 세 유형을 확인해 보겠습니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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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첫 번째 케이스는 주님이 따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진해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57절입니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그냥 따르겠다도 아니고 어디로 가시든 따르겠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케이스입니까? 맹목적인 사람입니다. 경솔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으레 행복하리라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복만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겁니다. 주님 따라가면 만사가 형통해질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겁니다. 자원하고 나선 이 사람을 주님이 당신의 제자로 삼지 않습니다. 대신 냉엄한 현실을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십니다. 꿈에서 깨라고 하십니다. 너는 만사형통, 축복만 생각하지? 그러나 나를 따르는 길은 그런 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나는 거지같은 사람이니 나를 따른다는 게 얼마나 고생스럽겠느냐고 하십니다.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여우와 새는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짐승들입니다. 우리말에도 저 여우같다고 할 때 간교한 사람을 뜻합니다. 유대인들도 그런 뜻으로 여우라는 말을 씁니다. 늘 교활하게 이스라엘을 괴롭힌 암몬을 여우라고 했고, 헤롯왕을 주님이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새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는 떼로 몰려와 애써 농사지은 것을 먹어버린다고 해서 에돔 족속이나 로마인들을 새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로는 오랑캐라는 뜻과 같습니다. 여우와 새는 경계와 미움의 대상입니다. 그들조차 깃들일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당신의 처지와 삶을 딱하게 표현하셨는데,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오직 행복하리라는 전제나 축복만을 전제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 합당치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따르겠다고 나서는데도 주님이 경계하십니다. 결국 이 사람은 실망하고 돌아선 것 같습니다. 주님을 따랐다는 언급이 없습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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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여러분, 오늘 본문이 이 사람을 제일 먼저 내세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결국 이런 기대를 갖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다수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우리도 만사형통을 기대하며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전제로 주님을 따르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머리 둘 곳 하나 없는 주님을 따르는데 시련이 더 많지 않겠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복, 성공, 형통만 생각하고 주님을 따르면 반드시 실패하고 맙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적절하지 않습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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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두 번째 케이스는 주님이 먼저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도 주님의 요구를 거절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긍정적이고 호의적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59절입니다.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따르기는 하되 부친 장례부터 먼저 치르고 따르겠다고 합니다. 일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부친 장례라는 건 인간사에서 큰일 중 하나입니다. 살아있을 때는 제대로 못했더라도 돌아가신 분의 장례를 잘 지내야 하는 것은 상식적이고 도덕적이며 모범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사람 말에 동의하셨습니까? 놀랍게도 허락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부친 장례를 치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핵심은 무엇일까요? 평상시라면 아들이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게 도리입니다. 그러나 인간사에서 가장 엄숙하다는 부친 장례조차도 주님을 따르는 일 앞에서는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부친 장례를 주님 따르는 일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면 그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데 합당치 못한 자입니다. 두 번째 케이스는 주님을 따르는 일을 2순위로 두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는 내 제자가 되기에 합당치 못합니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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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마지막 케이스는 61절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주님이 이 사람을 해석합니다. 6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사람은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다가 가족들과 작별 인사하러 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주님이 밭 갈면서 쟁기 잡고 뒤돌아보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이 경우도 평소라면 상식적입니다. 먼 길 떠나는데 가족들과 작별인사 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종말론적이고도 비상상황에서는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르면서도 자꾸만 뒤돌아 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인사하느라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합니다. 어김없이 우리도 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주님을 따르는 일이 지체되고 미뤄집니다. 롯의 처도 결국 쟁기질하며 뒤돌아 보다 망했습니다. 소돔성을 탈출하여 구원의 성 소알을 향해 뛰다가 뒤돌아 보다 소금기둥이 되었고, 이스라엘도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가면서 자꾸만 뒤돌아 보다가 객사했습니다. 광야에 뼈를 묻었습니다. 이삭이 아무리 소중해도 하나님이냐 이삭이냐는 상황에 몰려 택일해야 하는 경우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삭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평소에는 이삭을 보물 제1호로 삼으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삭이냐 하나님이냐 라고 할 때 하나님을 택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택해야 이삭도 찾고 하나님도 잃지 않는다는 겁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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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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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19 -->
<p class="p1"><span>주님을 따르는 게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하고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푸른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은 주님 나라의 제자가 되기에 다 합당한 자들이 되길 기원합니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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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br></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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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br></span></p>
<!-- paragraph:p0022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www.youtube.com/embed/ubH08adlo9c" title="미디어 원본"></a></span>
<!-- paragraph:p0023 -->
<p class="p1"><span><br></span></p>
<!-- paragraph:p0024 -->
<p class="p1"><span><br></span></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