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형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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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기서 말하는 <거미형>이란 얼마 전 국내에서도 개봉하여 흥행에 성공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나 무슨 거미처럼 볼록한 배와 가느다란 팔다리를 가진 복부 비만형의 체형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키에르케고르가 세상 사람들을 분류할 때 적용했던 가장 부정적인 형태의 한 인간 유형을 뜻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달콤한 꿀로 남을 행복하게 하는 <꿀벌형 인간>(베이컨)이나 어디에도 정착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훨훨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자유하는 <나비형 인간>(키에르케고르)에 반해 자기가 쳐놓은 그물에 웅크리고 앉아 거기에 걸려드는 것을 잡아먹고 사는 독거미 같은 인간 유형을 가리킵니다.
요즘 교계에 때 아닌 세습논쟁이 뜨겁습니다. 처음 교회를 개척한 목사가 공로자로서의 위세를 내세워 자기 자식에게 그 교회를 대물림하겠다는 것입니다. 급기야 지난 달 25일에는 감리교 총회가 <세습방지법>이라는 것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대형교회들은 여전히 세습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노자의 도덕경 앞에 서면 늘 제 몰골이 부끄러워집니다. 기독교 신자로서, 목회자로서의 모습이 너무 옹졸하고 치사하게 느껴져 깊은 반성을 금치 못합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공을 세웠으면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경구 하나만 해도 유교나 잘못 해석된 기독교의 도그마보다 얼마나 더 시원하고 명쾌한지 모릅니다. 물론 성경에도 그같은 말씀이 없지 않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였다. 수고는 남들이 했는데 다만 너희는 그 기쁨에 참여한 것이라>(요 4:38)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내 삶이 어떤 것 위에 세워졌고, 내가 내 삶에 대해 감사해야 할 이유와 나아가서는 대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옳은 것인가를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교회 세습은 결국 공로싸움입니다. 거기에는 <내가 심은 것이니 반드시 내가 거둬야겠다>는 철저한 이기심과 장삿속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홀로 즐기는 기쁨만 있을 뿐 더불어의 기쁨은 없습니다. 이웃도, 진정한 사랑도 있을 리 없습니다. 모든 이들을 오직 자신의 수확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거두는 것은 다 자기의 공로일 뿐입니다. 오늘의 처지, 오늘의 성공을 모두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만 믿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거둬들이는 자의 보람에 비해 심는 자의 기쁨이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내어 주는 감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홀로의 기쁨이 아니라 더불어의 기쁨입니다. 뿌리는 이와 거두는 이가 함께 기뻐하는 행복입니다. 내가 심은 것을 남이 거두며 기뻐하는 것에 내가 참여한다는 것은 삶의 진정한 환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단순히 심고 거두는 그 자체보다도 너를 만나는 공존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지금의 내 삶도 실은 내가 심어서 거둔 게 아니라는 자각입니다. 내가 여기 있음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숨은 손길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삶이 감사한 것이고, 또 받은 자로서의 감격과 기쁨 때문에 다시 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거두는 것을 목표로 삼거나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심는 일을 내가 할 일의 전부로 알고 심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거저 받았기 때문이요, 또 심는 일에서 이미 거두는 자의 기쁨을 함께 누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심은 것을 거두고 당신은 내가 심은 것을 거두고!> 여기에 바로 보람과 기쁨에 찬 아름다운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내가 심은 것이니 내가 거두겠다는 것은 당연지사고, 문제는 네가 심은 것까지도 내가 거두되 수백 배, 수천 배라도 수확하겠다는 데서 우리의 삶의 장과 교회 현장이 극도로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이제 목회자들도 더럽게 늙지 않기 위해서 <功成而不居>를 염불처럼 외며 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