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20930m 우상의 제물과 양심의 자유(고전 8:1-13)

20120930m

고전 8:1-13

우상의 제물과 양심의 자유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한 때 전국의 유명 사찰을 찾아다니며 부처님 앞에 절하던 사람이 몸이 자꾸 아파서 평소에 알고 지내던 같은 단지 집사님을 따라 교회에 나왔습니다. 교회에 몇 번 출석을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마음도 몸도 편하고 좋아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아예 종교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전격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문제는 자기 방에 20년 동안 두고 섬기던 동자 부처님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겁니다. 몇날 며칠 고심한 끝에 결국은 그걸 반납하기로 하고, 충북 단양에 있는 천태종 본산이 있는 소백산으로 가서 돌려줬습니다. 20년 동안 섬기던 것이어서 자꾸만 눈물이 앞을 가려 마지막으로 절을 바쳤다고 합니다. 이제 저는 예수님께로 갑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말입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시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 신도 아닌데 그냥 내다 버리면 되지 뭘 그렇게 반품하고 눈물의 인사까지 바치느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 중에도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계시고 하나님도 계신데 하나님이 더 센 신이기에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일본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 신을 섬기는 것보다는 가능하면 많은 신을 섬기는 게 더 복되다는 겁니다. 일본에는 신이 800만이 넘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그 많은 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일본 선교가 어려운 겁니다. 유일신 개념이 없습니다. 


오늘 예배에도 차례상을 차리고 나오신 분이 있으실 줄 압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 고린도 교회는 이 문제 때문에 아주 심각했습니다. 분열과 혼란을 겪었습니다. 교회 안에 두 파가 있었습니다. 우상 앞에 바쳤던 제물을 먹는 파가 있었고, 죽어도 안 먹는 파가 있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는 파는 안 먹는 파를 무식하고 유치하다고 욕하며 배제했고, 안 먹는 파는 먹는 파를 가짜요 사이비라며 욕했습니다. 고린도는 지금도 그리스의 최대 항구도시인데, 바울 시대 때도 그랬습니다. 수도 아테네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약 10km 이내입니다. 이미 바울 시대 때도 외국의 상선이 많았고, 우상숭배도 유난히 극심했습니다. 고린도에는 사랑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한 때 거기에는 1000명이 넘는 미녀 사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고린도의 우상숭배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저자에 나오는 고기가 다 신전에서 나오는 고기였습니다. 날마다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거기서 고기가 다 소화가 안 되니 시장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유통되던 고기는 다 젯밥이었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 중 일부는 거리낌 없이 그걸 사먹었고, 일부는 그 고기를 사 먹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먹는 파입니까? 죽어도 안 먹는 파입니까?


가끔 상가에서 개업 고사를 지내고 음식을 제게 가져옵니다. 일 년에도 여러 차례 가져옵니다. 우상의 제물인 줄 알면서도 아무 부담 없이 먹었던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까요? 한 마디로 그들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겁니다. 4절 하반절입니다.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이게 그들의 확신이었습니다. 따라서 먹고 마시는 일에 거리낄 일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을 보면 바울도 그런 입장에 대해 동의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맞다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2절에 가서는 다시금 맞긴 맞는데, 그게 다는 아니라고 합니다. 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안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7절입니다.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모든 사람이 다 우상의 제물에 관해 바른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그걸 때문에 자기가 더러워졌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내 신앙 양심에 비추어 아무 가책이 없다 해도 그게 아직은 약한 형제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자기 신앙 양심에는 거리낌 없으나 자기의 그런 행동을 보고 약한 사람이 시험에 든다면 자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지식을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몰랐다는 것이고, 그게 그들의 한계라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지적한 겁니다. 자신만 알았지 형제들은 몰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1절 하반절에서 지식은 자칫 사람들을 교만하게 하나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합니다. 또 3절을 보면 하나님은 지식을 가진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받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잘난 사람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자를 즐겨 받으십니다. 또 11절을 보면 그게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해도 약한 사람이 나의 지식 때문에 다칠 수 있다면 그 옳은 일을 자제하는 게 맞는 것이고, 이게 기독교가 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13절에서는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바울이 채식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내가 우상 앞에 바친 고기를 먹으므로써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실족하게 된다면 차라리 평생 입에 고기를 대지 않으리라는 선언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도 평생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도 채식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 동네 아이들과 싸움이 붙었는데, 친구 위에 올라타고 주먹질 하고 있는데, 깔린 아이가 나도 너처럼 고기를 먹으면 이렇게 맞지 않을 거라고 한 말에 슈바이처는 충격을 받고, 평생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습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자유가 남을 해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형제 사랑이요 이웃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이 드러내 놓고 술 마시고 담배 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음주와 흡연이 그의 신앙 양심을 파괴하지 않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유의 기독교 전통에서는 그런 행위로 시험에 들 사람이 충분히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음주와 흡연은 피해야 마땅합니다. 내 개인적인 신앙 양심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어도 나의 그 행위에 누가 다칠 수 있다면 자제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함부로 먹고 마셔 약한 형제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명백한 죄라고 합니다. 음주와 흡연의 죄가 아니라 약한 형제를 돌보지 않고 해친 죄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나만 좋으면 된다, 나만 거리끼지 않으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만 좋은 게 아니라 남에게도 덕이 되어야 합니다. 내게 아무리 좋아도 남에게 덕이 안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 양심의 자유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이 부분에서 많이 약합니다. 아직도 나만 옳으면, 내게만 좋으면 다 인줄 압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양심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먹을 수 있는 자유, 누릴 수 있는 권리보다 형제와 이웃의 덕을 먼저 배려하고 고려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9절입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래서 제가 음주 흡연하시는 분들에게 부탁하는 게 있습니다. 드러내 놓고 하시지 말고, 몰래 피고 몰래 마시라고 합니다. 그것은 비굴한 게 아니라 남을 위한 배려입니다. 이렇게 하여 남을 보호하는 게 기독교 정신에 맞는 얘깁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10장 23-24절을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염두에 두어야 할 사랑과 덕의 결론입니다.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원문 자료와 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