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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20916n 준비하시는 하나님(창 2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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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20120916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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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창 22:7-14</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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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준비하시는 하나님</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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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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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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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어린 이삭이 자기를 불사를 나뭇가지를 등에 지고 모리아 산을 오르며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하나님께 바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합니다. 과연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거기에 숫양 한 마리를 준비해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에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되는데, 거기서 나온 말이 &lt;여호와 이레&gt;입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1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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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아브라함이 체험한 남다른 하나님의 축복이고, 그의 신앙고백이자 위대한 간증입니다. 사실 이 사건뿐 아니라 그의 생애는 언제나 그랬습니다. 그가 얻은 것, 누린 것은 다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었습니다. 그가 이룬 것은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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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여호와 이레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거기에서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살았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지방, 유프라테스강 하류요, 지금의 이라크 지역입니다. 지금 지명으로도 우르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살 때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이방신을 믿었습니까? 많은 분들이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아비와 그 친척들은 이방신을 믿었기에 아브라함을 거기에서 불러내셨다고 합니다. 맞습니까? 여호수아 24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으면 아브라함도 당연히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당시는 절대 가부장제도였습니다. 족장의 신앙이 그 종족의 종교를 결정했습니다. 가장의 신앙이 가족들의 신앙을 결정하던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택해서 거기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낯선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말이 쉽지 실제는 쉽지 않습니다. 당시에 자기 종족의 영역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나무로 말하면 뿌리채 뽑히는 사건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낯선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실제 자기의 본토 아비집을 떠났습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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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본문의 이삭을 바치는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제는 목을 따서 피는 버리고, 몸은 부위별로 각을 떠 불살라 바치는 제사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의 목을 따고 부위별로 각을 뜨라고 하십니까?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아브라함이 제 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명분이 있습니다. 아들 줄 때는 언제고 지금 다시 잡아바치라는 겁니까? 그 가혹한 하나님의 요구에 아브라함은 아무 저항 없이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누린 여호와 이레의 축복은 거저가 아니라 살인적인 순종의 결과였습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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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여호와 이레의 축복은 시험을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하실 때, 하나님이 망령에 든 것이나 피에 굶주린 게 아니라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위해 그를 시험하신 사건입니다. 창세기 22장 1-2절입니다.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위해 먼저 시험해 보신 사건입니다. 유사 이래 이런 시험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9절 이하입니다.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처음부터 하나님이 이삭의 고기와 이삭의 피를 마시겠다고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진지하게 정말 이삭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향해 시퍼런 칼을 뽑아 목에 갖다 대었습니다. 11절에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라고 다급하게 부른 것은 정말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쇼를 한 게 아닙니다. 0.1초만 늦었더라면 아브라함이 이삭의 목을 땄을 겁니다. 그래서 굳이 칼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자마자 거기에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6-17절도 보십시오.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시험도 없으면 진학도 승진도 없습니다. 어려운 시험일수록 그 영광도 큽니다. 쉬운 시험은 없습니다. 시험이 왜 어렵습니까? 시험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은 우리의 외아들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험은 가혹하고, 통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삭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이게 무너지면 내 인생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이게 다 이삭이요 100세에 얻은 외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과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한 말씀만 하시는 겁니다. ‘너의 외아들을 내게 다오.’ 말이 쉽지 누구나 그 시험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이삭을 바치라는 절체절명의 시험 한복판에서 절망하지 않고 아들의 목에 칼을 대면서도 끝내 외아들을 살려주실 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목을 먼저 내 댄 겁니다. 여호와 이레는 행운이 아닙니다. 이렇게 혹독하고 가혹한 시험을 이긴 자에게 약속한 값진 복입니다. 시험은 실패하면 비극이요 불행이나 통과하면 복입니다. 시험을 이기면 복입니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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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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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여호와 이레는 반드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왜 시험이 항상 우리의 외아들을 제물로 요구할까요? 왜 하나님은 외아들로 우리를 시험하실까요? 우리가 다 외아들에 목숨을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아들에게 내 인생을 걸고 온통 거기에 내 마음을 다 빼앗기고 살기 때문입니다. 외아들로 시험해 보면 당장에 확인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사실 그는 소중한 이삭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신앙을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믿음도 좋지만 100세에 얻은 이삭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 다른 것은 다 된다. 내 목숨도 가능하지만 이삭만큼은 안 된다는 게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실패를 반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옥 가도 좋으니 무조건 우리 아이 서울대만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험 앞에 다 달아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외아들이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도 외아들을 지키기 위해 믿습니다. 하나님 영광은 나중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이유,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어 마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그토록 소중한 외아들이었지만, 막상 하나님이냐 외아들이냐 라고 할 때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아브라함은 끝끝내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그것을 확인한 하나님이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도 다시 얻고 복도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궁극적 근거가 어디에 있었냐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혈육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철칙은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우선주의였습니다. 소위 모노 야웨이즘이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면 하나님도 아들도 잃지 않지만, 외아들 중심주의로 살면 하나님도 외아들도 잃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이깁시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삽시다. 그래야 우리의 기도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과 인생이 올해도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시는 복으로 충만하길 빕니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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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br></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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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br></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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