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16m 웃게 하시는 하나님(창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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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6m
창 21:3-6
웃게 하시는 하나님
[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기독교 신앙의 분위기나 빛깔을 칙칙하고 어두운 것으로 이해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삶의 기쁨과 낙을 빼앗아간다고 생각하기에 두려워합니다. 자칫 기독교 신앙이 내 삶의 흥을 깰 수도 있다는 피해의식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세계에 깊이 들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우울한 종교입니까? 하기야 주님이 웃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우셨다는 기록은 나옵니다. 히브리서 5장에 의하면 마지막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 핏방울과 땀방울만 흘리신 게 아니라 우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 요한복음 같은 경우에는 주님이 갈릴리 가나 혼인집에서 공생애 첫 발을 내딛습니다. 거기서 행하신 첫 이적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입니다. 무색, 무취, 무미한 맹물을 양질의 향기로운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이 주님 공생애 처음으로 행하신 이적입니다. 주님이 하필이면 공생애 첫 기적으로 물을 왜 포도주로 만드셨을까요? 포도주를 물로 만들지 않고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이게 당신이 전하실 천국의 본질을 그렇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기쁘고 즐거운 세계라는 것입니다. 기쁨이 바닥나고 웃음이 고갈된 세상에 다시금 기쁨을 회복하게 하려고 주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생애 첫 기적을 잔칫집에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금욕주의나 고행주의, 엄숙주의나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우울하고 칙칙한 비관주의,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기쁨의 종교입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비난할 때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욕으로 그렇게 비난했습니다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주님은 늘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천국은 상갓집이 아니라 잔칫집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주님이 실제 천국을 비유할 때 얼마나 자주 잔칫집을 소재로 삼으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대 선물은 웃음입니다. 동물은 울기는 하나 웃지 않습니다. 에덴은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사람들이 즐거워하며 웃고 살게 만드신 낙원이 에덴입니다. 그런데 범죄하는 바람에 그 즐거움의 낙원, 웃음의 낙원에서 추방되면서 웃음이 울음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즐거움이 괴로움으로 변하고 말았고, 기쁨이 고통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원래는 즐거움의 낙원인 에덴에서 늘 웃으며 살도록 창조되었는데 범죄함으로 인하여 웃음이 울음으로 변한 겁니다. 원래 에덴에서 자식을 출생하게 했다면 웃으며 태어날 것입니다. 행복한 웃음으로 태어났을 것입니다. 에덴에서 추방되면서 울며 태어나는 것입니다. 왜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 내 동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태어나게 하느냐며 항의하듯 울며 태어납니다. 평생 고통 가운데 울며 살다가 결국 사랑하는 가족에게 울음만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게 인생입니다. 에덴에서 살았다면 절대 인생이 눈물로 점철되지 않았을 겁니다.
울음은 죄의 쓴 열매입니다. 죄가 없었던들 울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훗날 천국가면 거기엔 울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흘린 눈물을 주님이 다 닦아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이 우신 분들은 꼭 천국 가셔야 합니다. 거기는 두 번 다시 거기는 곡하는 것이나 애통할 일도 없다고 했습니다. 웃음만 있습니다. 천국 간다는 것은 우리가 추방된 낙원으로 복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슬픔이나 눈물이 없습니다. 천국은 영원한 잔칫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꼭 천국 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축복의 조상인 동시에 웃음의 조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가장 먼저 웃은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7장 17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자 백 세 된 아브라함이 하도 기가 막혀 웃었습니다. 이어지는 18절을 보면 그 말씀은 고마우나 현실성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 계집종 하갈에서 낳은 이스마엘을 아들 삼아 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아니라고 합니다.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하십니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웃었다고 해서 이삭이라고 작명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또 웃습니다. 18장에 가면 사라가 웃습니다. 11절 이하입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하나님이 사라가 아들을 낳는다고 하니 사라가 어의가 없어 웃었습니다. 하나님이 너 왜 웃냐고 하니까 안 웃었는데요 합니다. 하나님은 너 웃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삭이 이삭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21장 6절입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하나님이 자기를 웃게 하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백 세, 구십 세 된 부부가 아들을 낳습니까? 완벽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러니 누가 안 웃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웃게 하는 분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늘 웃으며 살게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웃게 하신 하나님이 정말 그들에게 웃음의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웃게 하시면 모두가 다 웃습니다. 부부가 웃고 자식도 웃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 없이 남편은 백 세, 아내는 구십 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웃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자식을 주시니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얼마나 주위 사람을 기쁘게 했겠습니까? 40세, 50세에 낳은 늦둥이도 우리를 기쁘게 하는데, 백 세 구십 세에 낳은 자녀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기쁘게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이삭이 주님의 모형입니다. 주님은 불행한 인생, 울며 사는 인생에게 웃음을 되찾게 하시는 분입니다. 원래는 웃으며 사는 존재인데 죄 때문에 웃음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셔서 그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써 잃어버린 기쁨과 웃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누구나 죄 문제가 해결되면 허무의 문제, 울음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죄 때문에 그런 것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전하시는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원어로는 <유앙겔리온>입니다. 좋은 기쁨이라는 뜻의 <유>와 소식이라는 뜻의 <앙겔로스>의 합성어입니다. 즉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 복음입니다.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듣고 슬퍼할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 너는 살았다.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제는 울지 않아도 된다는 게 유앙겔리온입니다. 지옥에는 웃음이 없고 비명만 있습니다. 천국에만 진정한 웃음이 있습니다. 세상에도 기쁨이 있다구요? 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요 통곡일 지도 모릅니다. 돈이 없어 결혼 못한 어떤 노총각이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주웠습니다. 과연 듣던 대로 거인이 나타나 소원을 딱 한 가지만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노총각이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돈도 필요하고, 결혼할 여자도 필요한데 한 가지만 들어준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는데,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걸 한 건으로 처리하여 돈, 여자, 결혼이라고 했습니다. 마침 거인도 한 건으로 접수해 주었습니다. 그 노총각을 돈 여자와 결혼하게 했습니다. 세상 낙이 다 그렇습니다. 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데 허무합니다. 돈 여자와 결혼했으니 거기에 무슨 행복과 웃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요즘 얼마나 웃으며 사십니까? 웃어본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웃을 일이 있기라도 하십니까? 날마다 짜증내고 부부가 서로 싸우고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고, 이웃과 다툴 일은 많아도 정말 즐겁고 기쁘게 웃을 일은 눈 닦고 봐도 없습니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머리 감으실 때 어디부터 감으십니까? 머리부터입니까? 눈부터 감습니다. 머리를 안 감아도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싸우면 눈부터 감는다고 합니다. 설문조사 결과입니다.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이 자기 집이 가장 싫을 때가 아빠가 술 먹고 들어와 엄마와 싸울 때, 아빠와 엄마가 싸우고 서로 말하지 않을 때라고 했습니다. 엄마가 신경질을 부릴 때는 마귀할멈이라고 했고, 집이 지옥 같아서 들어가기 싫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집이 가장 좋을 때는 엄마와 아빠가 웃으며 말할 때, 엄마가 크게 웃을 때 가장 좋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너무 진지한 것 같습니다. 웃음이 풍성해야 복됩니다. 웃음이 있어야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의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령은 웃음의 영, 기쁨의 영입니다. 웃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툭하면 성내고 짜증부리는 사람, 굳어 있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주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웃게 하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웃음의 아들 이삭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삭을 주시려는데 우리가 뚱하게 있으면 어떡합니까. 네로가 무수히 많은 기독교인을 죽이면서 풀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혹독하게 죽이는데도 웃으며 죽더라는 겁니다. 저 사람들은 어떤 족속이기에 죽으면서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네로가 당황하고 고민까지 했다고 합니다. 스데반도 돌에 맞아 순교하며 천사같이 미소 띤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들 순교자들의 아픔이나 고통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순교자들은 굶주린 사자들에게 찢기고, 불타는 장작더미에 던져지면서도 결코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내일 모레 잡혀나가 목 베일 사형수인데도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논밭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우리는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하고,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어려우시겠으나 오히려 자족하고 감사하며 웃으며 사십시오. 사명감을 가지고 웃으십시오. 그래야 믿는 사람답습니다. 우리는 훗날 천국 가서 영원히 웃으며 살 사람들이기에 미리 훈련해야 합니다. 늘 밝은 미소를 띤 얼굴로 이삭처럼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안겨주며 사는 복된 성도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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