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나로 인해 기뻐하였도다(욥 29:11-17)

20120908

나로 인해 기뻐하였도다

욥 29:11-17


욥은 다시 과거 자신의 선행과 구제와 적선을 얘기합니다. 남의 높임과 존경뿐 아니라 자신이 남에게 베푼 자선을 고백하며 현실의 고통과 시련을 안타까워 합니다. 자신의 이력을 회고하며 지금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 회의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우리로서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지난 세월 나의 선한 삶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고난을 당할 수도 있고, 시련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빈민과 고아를 건졌다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12절).

가난한 자들이 모진 상처를 입거나 억압을 당해 욥에게 와서 호소할 때 욥이 그들의 탄원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손을 잡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당하게 짓밟히거나 유린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는 <빈궁한 자의 아버지>(16절)였습니다. 욥의 이런 삶은 그대로 오늘 우리 믿는 자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구제와 자선>, 힘없고 가난한 자들 편에 서서 그들의 권익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야 말로 이 시대 교회들에게도 여전히 소중하고 막급한 대사회적 책무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마 5:13-14)고 하신 것도 바로 그런 의미의 말씀이었습니다.


맹인의 눈이 되고 저는 자의 발이 되었다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15절).

사회적 약자들인 장애인들을 돌보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다는 회고입니다. <맹인의 눈, 저는 자의 발>이 되었다는 진술은 그들에게 결정적인 도움이 되고 그들이 가장 절실하게 여기는 부분에 도움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욥은 정말 자신의 고백처럼 <의를 옷으로 삼고, 정의를 겉옷과 모자>(14절) 같이 여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요즘 우리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이런 욥의 모범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가 과거 우리 사회에 미친 여러 가지 아름다운 기여와 긍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와서는 많은 비난과 비판에 직면한 것은 이런 기독교 본연의 대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탓입니다.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자성하고 결단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었다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17절).

과격한 표현이지만 정의와 공의를 위해 그만큼 역동적으로 살아왔음을 원색적으로 고백하는 대목입니다. 욥은 평소 약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송사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그야말로 불의한 자들의 턱뼈를 부술 만큼 강력한 방어력을 동원하여 사회적 약자들을 지켜왔습니다.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냈다>는 것은 약탈당한 재산을 악착같이 되찾아 그 피해자에게 돌려줬다는 뜻입니다. 정말 <온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자>(1:1)답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이 사탄에게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1:8)고 자랑하실 만 한 의인 아닙니까? 그런데도 욥은 처절한 고난을 당했고, 참혹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욥의 친구들의 단정처럼 저주나 심판이 아니라 연단과 축복이었습니다. 부디 욥을 생각하시며 지금 겪고 계시는 시련을 잘 감당하시고 보란 듯이 이기셔서 결국은 욥처럼 갑절의 축복을 누리게 되시길 빕니다.